⑦ 김홍도 ‘총석정도’
(위부터)김홍도, 1788년(44세) 이후, <해동명산도첩>의 ‘총석정도’, 국립중앙박물관 (아래)김홍도, 1795년(51세), <을묘년화첩>의 ‘총석정도’, 개인 소장
검은빛 대신 바위 결의 형태미 살리고
돌기둥 모아 필선 진하기로 깊이 연출
선택과 집중, 비움과 채움의 묘미 탁월
영조(재위 1724~1776)가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읽으며, “대관령 동쪽 지역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정2품 관리 원경하가 “미처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다시 “괴이한 돌이 있다는데 그러한가?”라고 왕이 묻자, 원경하는 “그림을 보니 강원도 통천(通川)에 총석정(叢石亭)이 있는데 매우 기괴합니다”라 말했다. 왕은 “그곳은 진실로 좋으니 승경(勝景)에 들어가야 한다”고 명했다. 1746년 음력 5월1일 영조가 경연(經筵·왕과 신하가 책을 읽고, 국정 현안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이다. 신하가 ‘기괴하다’고 하고, 왕이 ‘진실로 좋다’고 한 총석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가 바로 총석정이다.
‘총석’은 총총히 서 있는 바윗돌로, 용암이 식으며 형성된 주상절리(柱狀節理) 돌기둥이 모여 있는 형상을 칭한다. 주상절리 돌기둥이라 하면, 철원과 제주 풍경이 떠오르지만, 옛사람들은 통천 총석정을 찾아가 감탄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다. 통천 시가에서 동북쪽으로 7㎞ 올라간 해안가에 길게 뻗은 다각형 돌기둥들이 장관을 이룬다. 북한 지역에 있어 지금은 갈 수 없고, 조선인 원경하도 가본 적이 없는 그곳을 18세기 최고의 화원화가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가 다녀왔다.
1788년 44세의 김홍도가 정조(재위 1776~1800)의 명을 받들어 동료 화원 김응환(1742~1789)과 약 50일간 대관령 동쪽 지역과 금강산 지역을 여행했다. 이 여행의 결과로 제작되었을 밑그림 수십점이 전해지는데, 그중 ‘총석정도’도 있다. 필선이나 구성의 멋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밑그림이다.
그러나 7년 뒤 김홍도는 총석의 반듯하고 곧은 형상을 잘 살리면서 확 트인 바다가 주는 드넓은 기상까지도 전달하는 명작 ‘총석정도’를 남겼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 큰 돌기둥 네 개가 솟아올라 있다. 높이 15~20m에 이르는 이 돌기둥을 사선봉(四仙峯)이라 부른다. 김홍도는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선봉 바위 결을 잊지 않았다. 17세기 문인 김창협의 표현대로 ‘빗살’처럼 가지런한 바위 결을 무른 필치로 가볍게 쭉 내리그어 표현했다. 선과 선 사이를 비워 총석의 가지런한 형태미를 돋보이게 했다. 이는 총석의 현무암이 내뿜는 진한 검은빛을 포기한 결과이다. 이처럼 실경을 화폭으로 옮길 때 화가는 경물의 선택과 집중, 공간의 비움과 채움을 고려해 그림을 구성한다.
해당 지역의 모든 경물을 다 그린다면 어떠한 경물에도 시선이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는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이 그림은 경물 표현뿐 아니라 배치에도 선택과 집중의 묘를 발휘했다. 총석정이 있는 언덕과 돌기둥을 화면 오른쪽에 모아 놓았다. 경물들이 모여 있지만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공간감이 느껴진다. 이는 경물을 묘사한 필선의 진하기를 달리한 효과이다. 앞 사선봉과 소나무는 좀 더 진하게, 뒤 돌기둥을 흐리게 처리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공간을 연출했다. 김홍도는 비우고, 모으고, 흩어 놓으며 공간의 깊이를 더하는 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비워둔 왼쪽 공간 아래 파도가 돌기둥을 향해 밀려가고 있다. 독특한 녹색빛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자 흰 포말을 일으킨다. 금방 사라지는 포말을 빠르고 세찬 붓놀림으로 포착했다. 파도가 맞닿은 바위들을 각지고 진하게 묘사해 무른 필치의 돌기둥과 대조를 이룬다. 흰 포말 위로 날아오르는 작은 새 두 마리에 시선이 머문다. 사선봉 위 홀로 선 소나무와 총석 언덕 위 작게 그려진 총석정도 작지만 그림을 풍부하게 하는 요소이다.
비워둔 왼쪽 공간 위를 붉은 도장과 검은 먹글씨로 채웠다. 길쭉한 돌기둥에 어울리는 타원형 도장으로 글이 시작된다. “을묘년(1795년) 8월, 김경림에게 그려준다. 단원(乙卯中秋 寫贈金景林. 檀園)”이라는 글로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김홍도가 한양의 첫째가는 거부인 경림 김한태에게 그려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이때 그린 그림이 두 점 더 있다. 을묘년에 제작했다 하여 <을묘년화첩>으로 부른다. 이후 김홍도는 차비대령화원 외 다른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즐겨 쓴 타원형 도장의 ‘좋은 산수에 마음이 취하네(心醉好山水)’라는 글귀처럼 자연의 깊은 정취를 살린 그의 산수화는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