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가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대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외교 무대에서 의상은 단순한 ‘패션’이 아니다. 때로는 메시지를 압축한 비언어적 외교 상징이 된다. 지난 8일 북한 평양에서 공개된 북·중 정상 부부의 사진은 데칼코마니 구도로 기묘한 느낌까지 자아냈다. 거울을 마주 세운 듯 닮아 있는 네 사람의 배치는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북·중 양국이 세계를 향해 연출한 또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였을까.
이날 북·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행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붉은 카펫 중앙에 나란히 섰다. 양옆으로는 중국 국기와 북한 국기가 대칭적으로 배치됐고, 그 뒤편에는 각각 펑리위안 여사와 리설주 여사가 같은 간격을 유지한 채 서 있다. 두 사람은 마치 미리 맞춘 듯 흰색 계열 의상을 입었다. 붉은 국기와 카펫, 초록빛 잔디가 만드는 강렬한 색채 속에서 두 퍼스트레이디의 흰색만이 유독 도드라졌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일정이 21발 예포, 의장대 사열, 김일성광장 환영행사, 거리 양편을 가득 메운 군중 환영으로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기사에는 “두 당과 두 국가의 최고지도자들“이라는 표현이 반복 사용됐다. 기사에 실린 사진 역시 네 사람을 기록한 사진이면서 동시에 두 체제의 결속을 시각화한 사진에 가까웠다.
실제로 시 주석의 이번 방북은 단순한 우호 방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중국과 북한은 오랫동안 양국 관계를 ‘피로 맺어진 우의’라고 표현해 왔다. 그러나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이 강화되면서 북·중 관계 역시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에서 연출된 환대는 단순한 외교 의전이라기보다 두 체제가 여전히 전략적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
영국 공영 BBC도 이번 시 주석의 평양 방문이 단순한 우호 협력보다 중국의 대북 영향력 재확인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BBC는 북한을 중국이 “통제할 수는 없지만 결코 잃을 수도 없는 이웃”이라고 표현하며, 최근 북·러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베이징이 평양에 대한 영향력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한 역내 불안정은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러시아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상황 역시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방북은 전통적 우의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북한이 여전히 중국의 전략적 영향권 안에 있음을 대내외에 보여주려는 성격이 짙다는 평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맨앞 왼쪽)이 8일 평양 순안국제공항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석해 이동하고 있다. 뒤로 부인 펑리위안 여사가 따르고 있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맨앞 오른쪽 )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날 김 위원장 부부는 공항에서 시 주석 부부를 직접 영접했다. /신화통신·AP 연합뉴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두 정상보다도 뒤편에 선 퍼스트레이디들의 모습이었다. 리 여사와 펑 여사는 마치 사전에 조율한 듯 화이트 계열 의상을 선택했다. 펑 여사는 한때 ‘중국 소프트파워의 얼굴’로 불리며 시 주석의 주요 해외 순방을 함께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해외 순방 동행과 공개 활동 빈도가 줄어들었다.
펑 여사는 지난해 시 주석의 한국 국빈방문 및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평양 방문에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만큼 북·중 관계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도 적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두 정상 부부가 나란히 자리한 모습은 북·중 관계의 현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작동했다. 두 사람이 선택한 흰색 역시 단순한 취향의 일치라기보다 조화와 결속을 강조하는 정치적 색채로 읽힌다.
펑 여사의 패션 외교는 그간 외신의 주목을 받아왔다. 2013년 3월 시 국가주석의 첫 해외 순방이었던 러시아 국빈방문 당시, 펑 여사는 짙은 네이비 코트와 절제된 디자인의 핸드백 차림으로 등장했다. 당시 BBC는 “중국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세련된 현대적 퍼스트레이디 이미지를 내세웠다”고 평가했고, CNN은 “중국의 새로운 소프트파워 아이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중국 내에서는 그가 착용한 중국 디자이너 마커의 의상과 광저우 브랜드 제품이 품절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창덕궁 불로문 지나는 펑리위안 한국을 국빈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오른쪽)가2014년 7월 3일 청와대 조윤선 정무수석(왼쪽)과 함께 창덕궁 불로문을 지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흰색 계열 의상은 펑 여사가 외교 무대에서 자주 활용하는 색이다. 2014년 방한 당시 창덕궁을 찾았을 때도 중국풍의 흰색 긴 재킷과 원피스에 진녹색 꽃 모양 브로치와 진녹색 하이힐로 멋을 낸 차림이었다. 장문·이미숙이 2014년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퍼스트레이디 펑리위안의 패션 스타일링에 나타난 패션정치 연구>를 보면, 펑 여사가 입은 103개 의상을 분석한 결과 가장 자주 사용한 색채는 흰색이었고 그 다음이 검은색, 보라빛 계열이었다. 연구진은 펑 여사가 해외 순방에서 중국 전통문양과 중국풍 디자인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절제된 색채를 통해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국가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전통복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타일링은 중국 문화의 정체성과 국가 브랜드를 동시에 보여주는 ‘패션 정치’의 사례로 평가됐다.
반면 리 여사의 패션은 북한이 추구하는 ‘국가 이미지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처음 집중적으로 받은 건 2012년 7월이다. 평양 모란봉악단 공연 관람 행사에서 김 국무위원장과 함께 등장한 리 여사는 당시 북한 여성 지도층에게서 보기 어려웠던 현대적 실루엣의 의상과 핸드백을 착용했다. 이후 한국 국가정보원과 다수 언론은 해당 가방이 프랑스 명품 디올 제품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영국 가디언,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 해외 주요 매체들도 이를 집중 조명했다.
특히 눈이 쏠린 건 비싼 사치품을 착용한 의도였다. 리 여사가 든 고가의 가방은 김정일 시대와 달리 김정은 체제가 보여주고자 했던 새로운 북한 이미지였다. 폐쇄적이고 군사 중심적이던 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젊고 현대적인 국가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제시하려는 시도가 리 여사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와 한국 통일연구원 연구자들은 리 여사의 공개 활동 확대를 ‘북한 체제의 제한적 이미지 리브랜딩’ 과정으로 해석했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인 리설주 여사가 2018년 4월 27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만나고 있다.2018.4.27 판문점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경향신문 서성일 기자
패션 외교는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 국무위원장의 악수 장면이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패션 전문지와 외신은 퍼스트레이디들의 의상에도 주목했다. 김정숙 여사는 밝은 하늘색 계열 재킷을 선택했고, 리설주는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파스텔 톤 투피스를 착용했다. 미국 패션지 하퍼스 바자는 이를 “충돌보다 화해를 상징하는 색채 언어”라고 해석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군복과 제복이 지배하던 한반도 정치에서 부드러운 색상이 새로운 정치적 신호가 되고 있다”고 평했다. 서로 다른 색을 유지하면서도 적대성을 제거하는 방식, 즉 서로 다른 체제의 공존을 의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이번 북·중 정상 부부의 만남에서 두 퍼스트레이디는 ‘흰색’으로 데칼코마니 패션을 선보였다. 2018년 판문점에서 남북이 서로 다른 색으로 공존을 표현했다면, 2026년 평양에서 북·중은 같은 색으로 결속을 표현한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정상회담을 두고 중국과 북한이 서방을 향해 ‘공동전선(united front)’을 과시하는 무대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사진 속 두 여성의 흰색 역시 우연한 취향의 일치로만 보기 어렵다. 거울처럼 마주 선 두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은 오늘날 북한과 중국이 서로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세계를 향해 연출한 결속의 이미지였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