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 경쟁 속 중견국들의 역할은
안토니오 칼카라 브뤼셀자유대 교수
안토니오 칼카라 벨기에 브뤼셀자유대 교수가 지난달 12일(현지시간) 브뤼셀자유대 거버넌스 스쿨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브뤼셀 | 오동욱 기자 5dong@kyunghyang.com
AI 혁명 이후 세계 질서 변화…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쪽이 주도하는 체제로 기술·경제 시스템 분절
한국은 반도체·첨단 제조의 글로벌 리더, 유럽은 규제·표준 설정과 일부 기술에 강점…확대돼야 할 협력 모델
미·중, 핵심 기술 놓고 경쟁 불가피…최소한의 신뢰·소통 유지해 대결로 치닫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중견국이 기여해야
“강대국들은 앞으로도 인공지능(AI)과 같은 핵심 기술을 둘러싸고 경쟁할 것이다. 유럽·한국 등 중견국 연대는 이 같은 경쟁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닫는 위험을 줄일 수 있기에 중요하다.”
안토니오 칼카라 벨기에 브뤼셀자유대 교수는 심화되는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유럽·한국과 같은 중견국들의 역할을 이같이 강조했다. 칼카라 교수는 유럽연구위원회(ERC)가 진행하는 ‘디지털 시대의 경쟁(CODE)’ 프로젝트를 이끌며 AI와 반도체·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연구해왔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에 대응해 중견국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그가 다뤄온 주요 과제 중 하나다.
그는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커졌기에 유럽을 비롯한 중견국들의 협력은 사실상 불가피하다”며 “중견국 연대는 특정 강대국에 지나치게 의존해 생기는 위험을 줄이고, 위기 상황에서도 버틸 힘을 키우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또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있으나 기술 혁신 등에는 여전히 국제 협력이 필요한 만큼, 국가들 간 제한적인 공존과 선택적인 협력은 여전히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12일(현지시간) 브뤼셀에 있는 브뤼셀자유대 거버넌스 스쿨에서 그와 인터뷰했다. 다음은 칼카라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
- AI와 같은 기술은 오늘날 국제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나.
“우리는 AI의 발전이 이끄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다. AI는 이미 군사, 경제,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군사 영역에서는 정보 분석부터 자율 시스템, 전장 관리에 이르기까지 AI가 깊게 통합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AI가 기업 모델과 생산성, 나아가 사회 전반의 산업 구조를 재편할 가능성이 크다. AI에 대한 국가들의 경쟁 강도와 속도도 달라졌다. 국가들은 AI 주도권을 전략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산업과 지정학적인 경쟁을 동시에 촉발하고 있다.”
- 강대국들의 기술 패권 경쟁은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나.
“현재의 AI 혁명은 세계화와 개방성, 대규모 과학·경제 교류 덕분에 가능했다. 또 상호 의존과 공통 규칙에 기반한 안정적 국제질서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스템의 일부가 무너지고 있다.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지정학적 이유로 기술·경제 시스템이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체계로 분절되는 것이다. 국가들이 공급망과 연구 생태계, 디지털 인프라를 분리하기 시작하면 혁신이 둔화될 수 있다. 두 체제가 서로 다른 설비와 소프트웨어, 표준 등을 사용하게 되면 상호 호환성도 잃어버릴 수 있다. 중견국들은 두 기술 체계 사이에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 기술 경쟁에 따라 국가와 기업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현재의 기술 혁신은 국가 혼자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민간 기업의 역량이 매우 중요해졌고, 반대로 기업은 보조금·규제·시장 접근·안보 협력 등에서 국가 지원이 중요해졌다. 기업들은 정부가 산업 정책적 수단을 통해 지원해주는 것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이 그저 정부의 대리인(수단)으로 비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따라서 국가와 기업은 특정 사안에서는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면서도, 다른 사안에서는 이견을 보이는 등 정경관계에 새로운 역학 구도를 보이고 있다.”
- 기술 기업들이 고속성장하면 통제가 어려워지지 않을까.
“정부는 여전히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많은 수단이 있다. 규제를 통해 직접적 타격을 줄 수 있고, 특정 기업에 차별적 우대 조치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는 기업들로 하여금 국가 기조에 발을 맞추게 하는 강력한 유인이다. 하지만 과도한 규제는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 또 국제적 합의가 없다면 규제가 없는 국가의 기업이 더 강한 경쟁력을 보유할 수 있다. 이를 보면 규제의 많고 적음보다는 혁신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올바른 규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 현재의 경쟁이 미·중 양극 체제로 이어질 것이라 보는가.
“기술 생태계는 미·중을 중심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특히 AI와 반도체, 클라우드 인프라, 디지털 플랫폼 분야에서 그렇다. 하지만 질서 전체가 완전히 양극 체제로 굳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럽과 한국, 일본, 인도 등은 전략적 자율성을 유지하며 한쪽에 종속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에 지정학 자체는 다극 구조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워싱턴과 베이징의 정치적 선택이다. AI 거버넌스와 무역, 국제경제에 대한 협력이 강화되면 완전한 기술 분절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중견국 연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현 상황에서 유럽을 비롯한 중견국들의 협력은 사실상 불가피하다. 한국과 일본, 호주 같은 유사 입장 국가들과 유럽의 협력도 중요해졌다. 이들은 개방 무역과 기술 혁신, 안정적 공급망 유지라는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또 반도체와 첨단 제조 장비, AI, 핵심 인프라 분야에서 상호 보완적 특징도 지니고 있다. 다만 중견국 협력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정학 환경이 매우 분열돼 있고, 많은 국가들에 미국과의 전통적 동맹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중견국 협력은 초강대국의 영향력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강대국에 지나치게 의존해 생기는 위험을 줄이고, 위기 상황에서도 버틸 힘을 키우려는 노력이 될 것이다.”
- 중견국 협력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무엇보다 정치적 의지가 중요하다. 지속적 의지가 없다면 협력은 상징적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또 선언적 수사보다 실질적 협력에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는 핵심 기술에 대한 공동 투자와 공급망 조율, 산업 협력, 공동 연구 등이 포함된다. 기업과 연구기관, 산업 생태계를 국가 간에 더 긴밀히 연결하려는 노력도 중요할 것이다.”
- 한국과의 협력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은 반도체와 첨단 제조, 산업 혁신 분야의 글로벌 리더다. 반면 유럽은 규제와 표준 설정, 산업 조정, 일부 첨단 장비·기술 분야에서 강점이 있다. 이런 조합은 단순 무역을 넘어 공급망 회복력과 기술 거버넌스, 공동 연구, 산업 정책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과 한국만으로 미·중의 영향력에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국제 표준 형성과 글로벌 경제의 개방성 유지, 특정 기술 생태계에 대한 의존 완화에서는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확대돼야 할, 매우 가치 있는 중견국 협력 모델이다.”
- 기술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국제사회가 공존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지만 낙관적으로 본다. 첫째, 주요 행위자 모두가 통제되지 않은 기술 혼란을 피할 유인을 갖고 있다. AI는 사회 불안과 사이버 위험, 경제적 충격, 정치 조작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할 수 있는데, 지정학적 경쟁국들조차 체제 불안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다. 둘째, 기술 생태계는 여전히 깊게 연결돼 있다. 공급망과 과학 연구, 반도체, 에너지 시스템, 디지털 인프라는 국제 협력에 크게 의존한다.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과 같은 고도의 세계화 시대로 돌아가기는 힘들 테지만, 비용이 지나치게 커지는 영역에서는 제한적 공존과 선택적 협력이 여전히 가능할 것이다.”
- 공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과 전면적 대결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강대국들은 앞으로도 AI와 반도체, 에너지, 핵심 기술을 둘러싸고 경쟁할 것이다. 그 경쟁 자체는 사라지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신뢰와 소통, 제도적 협력을 유지해 경쟁이 영구적 분열이나 공개 충돌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기본적인 기술 표준을 조율하며, 글로벌 교류를 과도하게 훼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럽과 한국 같은 중견국들은 이런 측면에서 지정학적 분열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닫는 위험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결국 공존의 회복은 경쟁을 얼마나 책임 있게 관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