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헌재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성동훈 기자
한 사람이 가방을 멘 채 걷고 있다. 지나가던 오토바이 운전자가 가방을 잡아채 달아난다. 범죄자에게 절도죄가 적용된다. 누구도 피해자에게 묻지 않는다. ‘가방을 안 빼앗기려고 얼마나 저항했나?’
한 사람이 성폭행을 당한다. 가해자에게 강간죄가 적용된다. 법원은 피해자에게 묻는다. ‘성폭행을 피하려고 얼마나 저항했나?’
절도죄의 법정 형량은 6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이다. 강간죄는 3년 이상 유기징역, 유사강간죄는 2년 이상 유기징역이다. 어느 쪽이 더 중범죄인지는 자명하다. 그런데 절도 사건에선 피해자에게 어떤 증명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심각한 신체적 침해와 정신적 피해를 낳는 성폭력 사건에선 피해자의 증명을 요구하는 게 현실이다.
법원은 강간죄 구성요건에 ‘폭행 또는 협박’이 들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범죄 발생 당시 피해자가 처한 상황·맥락을 고려해야 옳다. 가해자가 상사여서 저항이 어려웠을 수도 있고, 겁에 질려 온몸이 얼어붙었을 수도 있다.
“강간 사건에서 강한 폭행, 협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 강간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피해 여성의 내면적 심리와 공포를 도외시한 견해다.” 22년 전인 2004년 당시 서울북부지법 박철 부장판사는 이런 판결문을 썼다.
유사강간 피해자 A씨가 낸 ‘동의 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사건이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에 회부됐다. A씨는 사건 당시 상황을 녹음했다. 최소 75차례 거부 의사를 밝힌 사실이 인정됐다. 법원은 그럼에도 ‘피해자가 동의하는 것으로 피고인이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고’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없었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폭행·협박 의미를 가장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最狹義說)’을 적용한 것이다. 강간·유사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항거불능’ 수준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사실상 죽을힘을 다해 저항해야 한다는 뜻이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거부했다면 강간은 발생할 수 없다는 왜곡된 통념이 담겨있다.
헌재가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낡은 해석을 폐기하고, 법원의 무죄 판결을 취소함으로써 재판소원 도입 취지를 살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