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5일 환경의날, 종로구 부암동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름하여 ‘은행나무 치유 예술제’였다. 음악회도 아니고, 전시회도 아니며, 특정 정치적 집회도 아니었다. 죽어가는 한 그루 나무를 살리기 위해 주민과 예술가, 환경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부암동 환기미술관 인근 공동사유지에는 수령 200년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높이 20m에 이르는 이 나무는 오랫동안 부암동 주민들의 풍경이었고 기억이었으며 그늘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무의 잎이 급격히 변색되기 시작했다. 한창 푸른 잎을 틔워야 할 계절에 잎이 누렇게 탈색되고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상함을 느낀 주민들이 나무 주변을 살펴보던 중 밑동과 뿌리 부근에서 정교하게 뚫린 구멍과 플라스틱 주입기 흔적을 발견했다. 주민들의 항의와 고발이 이어지자 미술관 측은 제초제 주입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나무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도 밝혔다. 그러나 주민들은 아직 충분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우려한다. 사태는 법적 대응으로까지 번졌고, 주민들은 지금도 나무를 살리기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열린 것이 바로 은행나무 치유 예술제였다. 주최 측은 “사랑하는 존재가 아플 때 곁을 지키는 마음으로, 나무를 향한 미안함과 생명 회복의 염원을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고자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죽어가는 나무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기도하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낯선 풍경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간 문명의 오래된 기억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제나 숲과 강, 나무와 함께 살아왔다. 현대 도시문명이 그 기억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한 그루 은행나무를 살리려는 노력
행사에 함께한,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의 저자로 잘 알려진 현경 교수는 울분을 토했다. “이 나무는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치유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공공성을 보지 못했다.”
나무는 누구의 것인가, 아니 누구와 함께 존재하는가. 이것은 우리 시대가 직면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법적으로 보면 사유지의 나무일 수 있다. 그러나 200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풍경을 만들고, 마을의 기억을 형성해온 존재를 단순한 사유재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명사적 질문과 만나게 된다. 인간은 자연을 소유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가. 근대 문명은 전자에 가까웠다. 자연은 개발과 이용의 대상이었다. 나무는 베어도 되는 것이었고 강은 직선으로 바꾸어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세계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2017년 황가누이강에 법적 인격을 부여했다. 강 자체가 권리의 주체가 된 것이다. 에콰도르는 헌법에 자연의 권리를 명시했다.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자연 자체의 권리를 인정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더 나아가 ‘사물의회’를 이야기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강과 숲, 동물과 자연도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가 아직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이미 인간 중심 문명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폭염과 홍수, 산불과 생태계 붕괴는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부암동 은행나무 사건은 단순한 지역의 갈등 사안이 아니다. 나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적 질문이 서울 한복판에서 제기된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번 사건이 새로운 시민적 실천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환경연합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시민 가디언십 조례’ 제정을 제안했다. 시민들이 도시의 나무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발상이다. 생각해보면 부암동 주민들의 행동 자체가 이미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었다. “남의 땅에 있는 나무인데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나무를 공동체의 일부로 여겼다. 그것은 단순한 환경보호가 아니라 공동체 의식의 발현이었다.
기후위기 시대, 문명의 방향을 묻다
이 장면에서 희망을 본다. 더욱이 이 사건이 환기미술관 인근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묘한 아이러니를 안겨준다. “환기는 나무를 참 좋아했다. 나무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마음을 썼다.” 김환기 회고록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수화(樹話)’, ‘나무와 이야기하다’를 호로 삼았던 화가를 기리는 미술관 곁에서 200년 된 은행나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깊은 성찰로 이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연과의 공존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사실 나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생태도시 서울’이라는 비전이 크게 논쟁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선거는 부동산 개발과 성장의 논리에 압도되었다. 서울의 미래를 둘러싼 논쟁은 대부분 개발과 가격의 언어 속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시민들의 현실적 고민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울의 미래가 개발의 언어로만 이야기될 수는 없다. 기후위기 시대 서울은 어떤 도시여야 하는가. 나무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생태적 공공성은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앞으로 서울이 답해야 할 핵심 과제이다. 다행스럽게도 부암동의 작은 공간에서 그 질문들이 시작되고 있다. 한 그루 은행나무를 살리려는 노력은 단순히 나무 한 그루를 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묻는 일이다. 개발 중심 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소유의 논리에서 돌봄의 논리로, 인간 중심 도시에서 생명 중심 도시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어쩌면 훗날 우리는 이 사건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200년 된 한 그루 은행나무가 서울 시민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방향을 묻던 순간으로. 그렇게 우리의 6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