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한 ‘선물’ 준비한 젠슨 황
구체적 투자 계획 없어···생태계 종속 우려도
협업하되 주도권 잃지 않도록 ‘투 트랙’ 필요
지난 7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KBO리그 두산과 키움의 경기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관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주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그의 한 마디에 대기업 주가가 들썩이기도 하고, 그가 먹은 메뉴가 무엇인지 주목받기도 했죠. 4박5일 간의 방한을 마치고 지난 9일 출국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이야기입니다.
젠슨 황 CEO는 입국 당시 “한국을 위한 깜짝 선물이 준비돼 있다”고 했죠. 그는 닷새간 주요 대기업 총수부터 스타트업 대표까지 두루 만났고, PC방·야구장·대학교 등에서 일정을 소화하며 자신의 ‘선물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떠들썩했던 그의 방한 일정은 마무리됐고, 이제 차분하게 그가 가져온 것을 들여다봐야 할 때입니다. 그의 선물은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거든요.
“지금이 바로 한국의 시간.” 젠슨 황 CEO는 방한 내내 한국을 추켜세웠습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로봇, 클라우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투자 계획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 CEO가 지난달 자신의 고향인 대만에서 연간 1500억달러(약 225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힌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한국에서 쇼만 하지 말고 투자도 해달라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죠.
젠슨 황 CEO가 언급한 한국 기업과의 협업 형태에 대해서도 뜯어봐야겠습니다. 대부분 엔비디아의 플랫폼에 한국 기업이 ‘올라타는’ 방식입니다. LG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황 CEO는 LG와 로보틱스 협력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어요. LG는 엔비디아의 ‘아이작 그루트’ 생태계를 기반으로 엔비디아의 레퍼런스(개발 표준) 로봇을 공동 개발하는 협업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두산도 살펴보겠습니다. 두산로보틱스는 엔비디아의 로봇 가상 실험실 플랫폼 ‘아이작 심’을 활용해 에이전틱 로봇 운영체제를 개발 중입니다. 이밖에도 젠슨 황 CEO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DSX’ ‘코스모스’ 등 엔비디아의 플랫폼이 함께 호명됐습니다. 한국 기업이 엔비디아와 협업할수록 엔비디아 중심 생태계에 편입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8일 서울대학교 해동첨단공학관에서 열린 ‘빌드어클로(Build-a-Claw)’ 행사장을 찾아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전문가들은 엔비디아와의 협력이 기술 종속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독자적 AI 생태계 구축 및 다각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경전 경희대 빅데이터응용학과 교수는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한국 기업들이 엔비디아 생태계에 들어간 것에는 득도 있고 실도 있다”며 “엔비디아와 협력하면서도 독자 기술 개발을 지속하는 ‘투 트랙’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한국 기업이 ‘을’을 자처할 이유도 없습니다. 엔비디아는 한국 기업을 필요에 의해 택했어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는 핵심 파트너입니다. LG, 두산 등은 엔비디아에는 없는 제조 역량과 경험이 있습니다.
엔비디아와 협업을 하되, 한국 기업이 주도권을 잃지 않도록 꾸준히 고민해야겠습니다. AI 산업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국가의 미래 먹거리인 만큼 국가와 기업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어제(11일) 반도체,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하나의 순환 구조로 묶어 한국을 AI 공급망의 핵심 거점으로 만드는 ‘프로젝트 트리니티’ 구상을 공개하기도 했어요.
엔비디아와의 협업은 한국 기업에 분명 도움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네이버는 엔비디아와 AI 팩토리 구축을 위한 공동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는데요, 이를 통해 아시아·태평양을 넘어 유럽과 중동 지역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전략입니다. 또 엔비디아는 현대차가 진행 중인 새만금 로봇·수소 첨단산업 클러스터에도 공동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젠슨 황 CEO가 한국에 와서 ‘립 서비스’만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방한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한국이 AI 산업의 핵심 플레이어임을 글로벌 시장에 각인시킨 것이죠. 이를 기회 삼아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높이 평가받고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깐부’는 단짝 친구를 뜻하는 은어죠. 엔비디아와 한국 기업이 진정한 깐부가 되려면 황 CEO가 한국에 남긴 숙제를 성실히 풀어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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