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예술가 9명의 노년 이야기 <피날레>
각자의 방식으로 ‘늙은 여자의 삶 발명’
<다락방의 미친 여자> 수전 구바 신작
수전 구바는 <피날레>에서 삶의 종반에 인생을 새롭게 창조해 낸 노년의 여성들을 소개한다. 북하우스 제공
피날레
수전 구바 지음 |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592쪽 | 3만3000원
19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조각가이자 화가인 루이스 부르주아는 대형 청동 거미 조각 ‘마망’(Maman)으로 국내에도 알려져 있다. 프랑스어로 엄마를 뜻하는 ‘마망’은 거대한 거미를 통해 여성의 강인한 모성과 연약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1999년, 그의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때에 제작한 작품이다. 같은 해 그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8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일흔을 넘겨 회고전을 할 때만 해도 그가 80~90대에 작가로서 황금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그때 부르주아는 “미술계가 사랑하는 짖궂은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의 회고전은 피날레가 아니라 서곡이 된다.
그는 일생을 통해 아버지의 외도 등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영감받은 작품을 선보여왔는데, 70대에는 이것이 분노와 같은 메시지로 표현됐다면 80대에 들어서는 상처에 대한 치유로 확장된다. 사망 2년 전인 2008년에 그는 대표 테마인 셀 연작의 하나로 ‘마지막 등반’을 내놓는다. 철망 케이지 안에 다양한 크기의 푸른 유리 구체들이 공중에 매달린 모양의 작품이었다. 부르주아의 어시스턴트였던 제리 고로보이는 이 작품을 “승천”으로 본다며 고통을 직면한 작가의 두려움 없는 태도를 나타낸다고 평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재창조해 낸 부르주아에게 노년은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 대표작 ‘마망’을 제작해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C)Oliver Mark, 위키피디아
<피날레>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갔던 ‘늙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여전히 미쳐 있는> 등을 통해 여성의 열망과 창조력을 읽어낸 수전 구바의 신작이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시발점이 된 기획이다. 그는 2008년 예순셋의 나이에 난소암 진단과 함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수술과 항암치료 끝에 살아남아 “기대하지 못했던 노년”을 맞는다. 이 경험은 그에게 삶의 종반에 이른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책은 그 연구 결과다.
루이스 부르주아를 포함해 조지 엘리엇, 콜레트, 조지아 오키프, 이자크 디네센, 메리앤 무어, 메리 루 윌리엄스, 궨덜린 브룩스, 캐서린 더넘 등 생의 마지막을 넘치는 생명력으로 살았던 예술가 9명을 소개한다.
‘연인’ ‘이단아’ ‘현자’ 세 가지 장으로 분류해 서술했다. 책은 이 세 가지를 “노화가 가져오는 여러 고통에 대한 해독제의 원료가 될 만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연인’ 장에 속한 이들은 노년에 연하의 남자들과 결합해, 사별했거나 배신한 파트너에게 느낀 슬픔과 신체적 무력함에 대처할 힘을 얻는다. ‘이단아’에 속한 이들은 노인들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냈으며 ‘현자’에 속한 이들은 사회 운동과 교육 활동으로 말년을 보낸 이들이다. 이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노화의 고통에 대항해 자신만의 “늙은 여자를 발명”해 낸다.
조지 엘리엇의 초상화. (C)Frederick Burton, 위키피디아
조지 엘리엇은 <미들 마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등 작품을 넘어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 사생활로도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본명인 메리 앤 에번스 대신 남성 이름인 조지 엘리엇을 필명으로 쓰고, 유부남이었던 조지 헨리 루이스와 20년 넘게 공개적으로 동거 생활을 했으며, 루이스가 죽은 뒤 18개월 만에 20세 연하의 남성 존 크로스와 결혼했다. 연하의 남편은 신혼여행지의 호텔에서 뛰어내려 자살 기도를 감행했으나 구조된다. 그로부터 일곱 달 뒤 엘리엇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엘리엇의 이야기는 이후 여러 창작물에서 ‘남자에게 매달리는 나이 든 여자’라는 평이한 관점으로 해석됐다. 저자는 다르게 본다. 크로스와 관계가 엘리엇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점에서 이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실제 엘리엇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을 “내가 들어갈 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때 주어진 경이로운 축복”이라고 묘사했다.
이 외에도 재즈 피아니스트 메리 루 윌리엄스가 육십대가 되어 교회 미사곡을 작곡하고, 안무가였던 캐서린 더넘이 흑인인권운동의 가치를 무대 안팎으로 넓힌 이야기가 소개된다. 책은 여러 “롤모델”을 통해 여성들이 ‘무사히 할머니가 되는’ 것을 넘어서 “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