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이 지난 4월 공연한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국립발레단 제공
1931년 ‘드라큘라’ 이래
대중적 기억에 새겨져 ‘블랙스완’
‘애비게일’ 등 할리우드서 자주 활용
오보에·반음계 불안 표현
하프와 현악기의 트레몰로가 만들어내는 잔잔한 호수의 수면. 그 위로 펼쳐지는 오보에의 선율은 비장하고 애절하다. 차이콥스키 발레곡 <백조의 호수>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이 테마는 처연하면서도 우아하다. 사랑의 비극적 운명을 예상케 하는 장면에 더없이 들어맞는 ‘백조 테마’. 그런데 종종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의외의 얼굴을 드러낸다.
지난달 내한공연을 펼친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선보인 <백조의 호수> 무대에도 이 곡은 흘렀다. 널리 알려진 애절한 사랑이야기 대신 심리 스릴러로 재구성된 이 작품에서 백조 테마는 치정과 욕망으로 뒤얽힌 불안한 서사를 이끄는 정서적 동력이 됐다. 원곡의 유장한 호흡 대신 빠른 템포로 몰아붙인 연주는 숨이 가빠질 만큼 긴장감을 끌어올렸고 묘하게 신경을 긁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이 테마가 다소 오싹한 느낌으로 표현됐던 적은 또 있다. 2010년 개봉했던 영화 <블랙스완>에서다. 원곡을 해체하고 재조립한 테마는 주인공의 예민한 정서와 불안을 받치는 뼈대가 됐다. 그 애잔하고 아름답던 선율이 이렇게 집요하고 서늘했던가.
할리우드는 이 선율의 다른 얼굴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1931년 만들어진 영화 <드라큘라> 오프닝에 이 테마가 사용됐다. 드라큘라와 백조의 조합이라니. 그뿐만 아니다. <미이라> <모르그가의 살인> 등 유니버설픽처스의 초기 호러 영화들 역시 이 테마를 오프닝에 활용했다. 이에 대한 시카고심포니오케스트라의 설명이 흥미롭다. 유니버설픽처스가 이 작품들의 오프닝에 백조 테마를 쓰면서 이 음악이 괴물 영화와 연결되는 대중적 기억을 갖게 됐다고 소개한다. 영화학자 제프 섹터는 “드라큘라에 대해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관객들에게 오프닝 테마는 오싹함과 어두운 로맨스가 뒤섞인 감정을 안겼다”고 설명한다.
2024년 개봉한 공포영화 <애비게일>에서도 이 테마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주인공이 백조 테마에 맞춰 춤추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드라큘라>의 기억을 노골적으로 불러온다. 감독 맷 베티넬리 올핀은 엔터테인먼트 매체 ‘게임스레이더플러스’(GamesRadar+)와 한 인터뷰에서 “처음 각본부터 애비게일이 이 테마에 맞춰 춤추는 장면이 있었고, 이를 통해 원작 <드라큘라>와 연결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드라큘라>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백조의 호수>는 그 영화의 테마처럼 기억된다”고 덧붙였다.
이 테마가 호러나 스릴러에 차용되어온 것은 단지 영화적 직감 때문만은 아니다. 음악 안에 이미 불안의 장치가 있었다. 국립심포니 이인영 오보에 수석의 설명에 따르면 오보에는 다른 관악기에 비해 미세한 떨림과 비브라토를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다. 그는 “현악기의 잔잔한 트레몰로 위에서 홀로 울려 퍼지는 오보에의 쓸쓸한 음색은 고독과 외로움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상행과 하행을 반복하며 고음으로 향하는 반음계적 선율은 불안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면서 “이 작품을 연주할 때마다 아름다움 속에 깊이 내재된 불안감을 표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