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1시 서울 을지로입구역 인근 도로 곳곳이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투명한 무지개색 비눗방울이 흩날리고 손목과 허리, 얼굴은 물론 온몸을 무지개색으로 뒤덮은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거리를 채웠다. 도로 양옆에서는 “최초의 논바이너리(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속하지 않는 성 정체성) 대통령이 되어보세요” “프리허그 합니다”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13일 서울 중구 을지로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2026 제27회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서울 중구 남대문로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제27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올해 축제의 슬로건은 “교집합: 다름을 연결로”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우리는 오랫동안 ‘다름’을 문제나 결핍으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며 “이번 축제는 각자가 선명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채, 서로에게 안전하게 닿기 위해 모이는 자리”라고 취지를 밝혔다.
축제 행사장 곳곳에서는 평소 일상에서 보기 힘든 각종 복장의 참가자들이 눈에 띄었다. 온몸에 무지개색 천을 두른 이은결양(15)은 “청소년 성소수자로서 정체성을 깨달은 뒤, 나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곳을 고민하다 오늘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며 “직접 주문 제작한 프라이드 플래그(무지갯빛 깃발)로 만든 옷을 입고 신발까지 맞춰 신고 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Yes homo’라는 문구가 적힌 쇼핑백을 들고 초록색 외계인 복장으로 나타난 A씨(32)도 있었다. A씨는 “평소 독특한 의상을 모으는 게 취미인데, 마침 퀴어 축제에서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개성을 뽐내기에 좋은 옷인 것 같아 골라 입고 나왔다”고 말했다.
2011년부터 축제에 참여해 왔다며 자신의 활동명을 ‘허리케인김치’로 소개한 B씨(36)는 은빛 보석이 박힌 드레스를 입고 거리를 거닐었다. ‘서울드랙퍼레이드’ 단체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이전 축제에서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반대 세력으로부터 ‘노출 축제’라는 비판을 받아 스스로 옷차림을 보수적으로 검열하곤 했다”며 “오늘은 검열을 내려놓고 시원하게 힘을 줘서 입어봤다”고 말했다.
13일 제27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각양각색의 복장을 뽐내고 있다. 김은송·박채연 기자
이날 축제 현장에는 총 70개의 부스가 설치됐다.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 성소수자부모모임,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등 여러 시민사회가 참여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영광제일교회,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제모임 등 종교계 단체들도 부스를 열고 연대의 뜻을 나타냈다.
성소수자부모모임 부스를 운영한 강선화씨(57)는 “아직 한국 사회는 가족주의 성향이 강해 부모에게 차마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성소수자들이 많다”면서 “이들은 축제 현장에서 이러한 부스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해지고 큰 힘을 얻는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퀴어 축제를 대하는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의 행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허리케인김치‘ B씨는 “성소수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할 인권위원장이 퀴어퍼레이드 참여에 소극적이거나 말을 아끼는 모습은 실망스럽다”며 “사회적 영향력이 큰 자리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과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지난달 22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겠다며 이에 맞불성으로 열리는 반동성애 집회 ‘거룩한방파제’ 행사장도 찾겠다고 해 논란이 됐다. 이후 안 위원장은 인권위 사무처에 퀴어 축제 부스 설치를 지시하지 않는 등 소극적 태도를 보였고, 결국 전날 두 행사 모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안 위원장은 이날 퀴어 축제와 맞불성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퀴어 축제에 인권위 부스는 설치되지 않았다.
인권위 내부에서도 안 위원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최준석 인권위 성차별시정과 조사관은 이날 퀴어 축제 현장에서 기자와 만나 “안 위원장의 종교적 배경과 언행을 보면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관심 있는지조차 의문”이라고 말했다.
거룩한방파제 집회는 이날 오후 1시부터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일대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은 ‘동성애 퀴어 축제 반대’ 등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퀴어 축제 참가자들과 충돌은 없었다.
▼ 김은송 기자 ssong@khan.kr 박채연 기자 applaud@khan.kr
“혼인 평등 지금 당장 실현하라! 우리 사랑 법적으로 인정하라!”
13일 오후 4시 서울 을지로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의 ‘모두의 결혼’ 행진 차량에서 사회를 맡은 최진아씨·임아현씨 부부를 따라 수백명이 이같이 외쳤다. 서로 손을 잡고 구호를 따라 한 이한샘씨(24)와 홍서현씨(22) 커플은 “우리를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고 말했다.
대전에서 온 이씨는 “3~4년 뒤 결혼하자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동성혼이 가능해지는 우리 사회를 바라며 이 행렬에 서게 됐다”며 “최근 법원이 동성혼 관계를 ‘사실혼과 유사한 생활 공동체’로 판단하는 등 한 단계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홍씨도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동성혼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적어도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돼 어떤 보호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13일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진에 참여한 이한샘, 홍서현 커플이 하트를 만들고 있다. 박채연 기자
같은 행렬에서 손을 잡고 걷던 레즈비언 커플 최모씨(29)와 김모씨(28)도 연인이 된 지 5년이 지나며 결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 중이다. 김씨는 “결혼은 하나의 권리이고 (동성 커플에게도) 동등하게 보장되는 것이 결국 시민으로 대우받는 것과 맞닿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행진하는 퀴어 축제 참가자들 옆에서 ‘동성애는 죄’라는 피켓을 들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동성애 마귀는 떠나가라”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행진 사회자가 “동성애 하면 지옥 간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와이프랑 지옥 가겠다”며 “우린 행복한 지옥을 만들겠다”고 말하자 참가자들은 “지옥에서 만나자”라고 함성을 질렀다.
참가자들은 항의하는 이들에게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손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 NO! 국민은 반대한다’는 피켓을 버스 창문 밖으로 보여주는 시민에게는 손을 흔들어줬다. 게이 커플 장모씨(31)와 김모씨(39)는 “동성혼이 법제화돼 결혼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씨는 “퀴어 축제는 명절 같다”며 “명절엔 좋은 사람도 싫은 사람도 보는 것 아니냐”고 했다.
행진이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와 세종호텔 인근에 이르자 연대의 외침이 나왔다. 사회자는 인권위를 지나며 “다들 인권위에 ‘마’ ‘뭐꼬’라고 소리 질러보자”고 했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퀴어 축제에 인권위 공식 부스를 만들지 않았다. 행진 참가자들은 노동조합이 해고 노동자들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세종호텔을 지날 때 “투쟁”을 외쳤다.
13일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진 참가자들 옆에서 시민들이 ‘여러분 많이 사랑해요’ 등 성소수자 연대 피켓을 들고 있다. 박채연 기자
함께 모여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 내는 것이 혐오에 대응하는 강력한 방법이라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양성애자 김모씨(26)는 “10년 전 (퀴어 축제에) 왔을 때는 혐오 세력이 커서 무섭다고 느꼈다”며 “현재는 축제 참여 인원이 (10년 전의) 10배가 된 것 같고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들(혐오 세력)이 웃기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있던 그는 “억압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에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보여준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더 용기를 받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경희대 소수자인권위원회 회원 10여명과 함께 온 대학생 최예원씨(22)도 “혐오 세력과 일대일로 만날 땐 위축될 수 있지만 이렇게 함께 목소리를 내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느낀다”며 “우리의 목소리를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퀴어 축제 참가자들의 행진은 서울 종로구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시작해 서울 중구 인권위와 지하철 4호선 명동역,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거쳐 을지로입구역으로 이어졌다. ‘모두의 결혼’을 포함해 ‘틴더’ ‘남태령 아스팔트 동지회’ 등 축제 참가 단체 10곳은 트럭을 타고 행진을 이끌었다.
▼ 박채연 기자 applaud@khan.kr 김은송 기자 ssong@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