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업계에 대한 통념은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공기와 묶여 있다.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광기의 랩소디>를 읽다보면, 1970년대 CPU와 메모리,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를 조립해 팔던 워즈니악과 잡스가 등장한다. 집에서 맥주를 빚듯 컴퓨터를 손수 조립하던 취미가들의 모임, 반문화의 세례를 받은 장발과 부츠, 신비주의적 언어, 크런치 모드로 불린 자발적 몰입이 뒤섞인 것이 그 시절 실리콘밸리였다. 빌 게이츠뿐 아니라 메타의 저커버그, 앤트로픽의 아모데이, 엔비디아의 젠슨 황까지, 기성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의 이미지가 이 산업의 표상이 돼왔다.
지난 13일 미국 정부가 클로드의 최신 모델 ‘페이블(Fable) 5’의 국외 사용을 제한한 일은 여러모로 곱씹을 만하다. IT 업계가 자유를 빼앗긴 것은 아니다. 초기 진공관 컴퓨터는 군사용으로 태어났고, 인터넷은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프로젝트였다. 괴짜 천재들이 대형 컴퓨터를 학교에서 나눠 쓰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방법을 고안하면서, 국가의 ‘전략 기술’이 민간 기술로 풀려났을 뿐이다.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의 <기술공화국 선언>이 소비재로 돈벌이나 하는 실리콘밸리를 질타할 때, 그 바탕에는 국가가 ‘거대 과학’에 투자해 전략 산업을 키우던 시절의 심상이 깔려 있었다.
조선업을 전략산업으로 호명한 미국
페이블 제한을 두고 소버린 AI의 필요성이 확인됐다는 말이 업계에서 나온다. 규칙 기반 질서로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던 자유무역이 지정학 앞에 뒤틀리고 병목에 걸리는 시대다.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은 IT만의 일이 아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조선업의 역사야말로 산업정책의 역사다. 정주영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어 선박을 수주하고 차관을 끌어왔다는 일화만 회자되지만, 신화 뒤에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의 보증과 기획이 있었다. IT가 군사 기술에서 민간으로 풀려났듯, 조선업도 국가 전략으로 출발해 2000년대 호황을 지나며 시장 논리에 일정 수준 내맡겨졌을 뿐이다. 사실 대형 조선소 법정관리나 매각이 어려운 것도 국가 전략의 속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업을 다시 전략 자산으로 호출한 건 미국이다. 미국은 군함 한 척을 한국의 6배 비용과 7배 기간을 들여 짓는다. 중국의 건조 능력은 2024년 초 기준 미국의 230배에 이른다. 군화와 군복은 자국산만(베리 수정법), 자국 항로는 미국에서 지은 배만(존스법) 쓰도록 법으로 묶어둔 나라가, 1970년대 이래 제조 역량을 방치한 까닭에 동맹국 한국에 기대는 역설이 벌어졌다. 유럽은 최근 한발 더 나아갔다. 1980년대부터 40년간 물량을 축소하는 구조조정만 해온 유럽의 선박은 점유율이 미미하지만,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올 3월 첫 ‘산업해양전략’을 채택해 건조·의장·수리 역량을 전략 자산으로 재건하겠다고 선언했다. 공공조달에 ‘메이드 인 EU’ 요건을 넣어 자국 건조를 떠받치고, 2030년까지 조선 인력 23만여명을 새로 채우겠다는 목표도 내놨다. 건조 역량의 유지·혁신이 국가의 역량이라는 판단이다. 한 번 흘려보낸 기반은 쉽게 되돌아오지 않지만, 기회가 되기만 한다면 제조 역량을 재건하려는 심산이다.
정작 한국은 전략 자산이라면서 원가 계산에만 골몰하는 것 같다. 업계는 원청 정규직 채용을 꺼리고 하청 임금 인상에는 더디다. 대형 3사의 하청 비중이 60%를 넘고, 미래의 용접 숙련도 외국인에게 모조리 넘길 분위기다. 전략 산업의 토대는 사람과 숙련인데,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고정비로만 셈한다.
인적·숙련 기반 구축에 정부 몫 필요
현재 추진되는 ‘조선산업기본법’이 원청의 하도급 비율을 제한하고 표준계약서를 의무화하려는 것은 단순한 친노동이 아니라, 전략 자산으로서 숙련 인력을 확보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위험을 하청과 이주노동에 떠넘기는 구조는 노동인권의 문제이며, 현재 진행 중인 상생협의처럼 노사정 사회적 대화로 산업 거버넌스를 안정시켜두지 않으면 전략도 인권도 함께 흔들린다. 1950~1970년대 미국의 엔지니어처럼, 조선업 인력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게 돕는 지원도 고민해야 한다. 비용 때문에 업계가 감당하기 어렵다면 정부가 자원을 들여서라도 인적·숙련 기반을 지켜야 한다.
미국·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처럼 지정학이 경제 환경을 완벽히 제약하는 지금, 어디까지가 시장의 몫이고 어디까지가 정부의 몫인지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산업의 의사결정이 적어도 국가의 전략적 판단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시대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