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431곳에 교섭 요구했지만 실제 교섭은 8곳
기업, 사용자성 인정돼도 재심…‘교섭 사법화’ 수순
노란봉투법 그래픽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생산라인에서 일하다 보니 휴게시간이나 휴무일, 라인 정지 여부도 현대자동차 생산계획에 따라 움직입니다. 임금도 원청이 하청업체에 노동자 1인당 도급비를 지급하면 그 범위 안에서 정해지고요. 하청업체 사장들조차 ‘우리는 아무 권한이 없고 원청이 다 결정한다’고 말합니다.”(윤상섭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장)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인 원청과 교섭할 수 있게 한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이 오는 17일 시행 100일을 맞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법이 시행된 지난 3월 10일부터 이달 5일까지 1137개 하청 노조가 431개 원청에 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청이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한 곳은 81곳(18.8%), 이 중 실제 교섭에 들어간 곳은 8곳(1.9%)에 그쳤다. “수백 개 하청 노조와 교섭 테이블에 앉게 될 것”이라던 경영계의 우려와 달리, 테이블에는 노조만 앉아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다.
‘진짜 사장’ 인정돼도 교섭은 안 했다
‘노란봉투법’ 시행 첫날인 지난 3월10일 서울 세종로에서 열린 민주노총 투쟁 선포대회에서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경영계가 예상했던 ‘쪼개기 교섭’은 아직 현실화하지 않았다. 노조법상 원청은 교섭 요구를 받으면 7일 이내에 사업장 게시판 등에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해야 하지만, 상당수 기업이 공고를 미루거나 노동위원회 판단을 구하고 있어서다. 지난 5일까지 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된 원청 사용자성 판단 요구 사건은 80건인데, 노동위원회는 이 중 69건(86%)에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 원청이 교섭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 사건 대부분에서 ‘진짜 사장’임이 인정된 셈이다.
그럼에도 실제 교섭에 돌입한 사업장이 한 자릿수에 불과한 건 판단에 불복해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 재심을 신청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7월부터 중노위 재심 판정이 본격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재심 판정에도 승복하지 않은 기업들은 행정법원·고등법원·대법원으로 이어지는 장기 소송전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조선·철강업계 대기업들은 이전에도 하청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장기간 소송을 불사해 왔다.
노란봉투법 안착에 적극 나서야 할 정부조차 책임을 피하려 하는 실정이다. 경기도가 지난 4월 노동국 명의로 위·수탁 노동자들에 대한 사용자성을 회피하는 방안을 담은 매뉴얼을 제작·배포한 사실이 경향신문 보도로 드러났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공공부문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한 곳은 경기 화성시, 전북 전주시, 인천 연수구 등 3곳뿐이다. 이마저 실제 교섭에 돌입한 곳은 없다.
노동부가 해석지침에서 ‘법률이나 국회에서 심의·의결한 예산에서 정해진 근로조건 등 관련 사항을 집행하는 경우’는 노사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모범 사용자로서 법 정착에 앞장서겠다고 공언해놓고 스스로 법을 피해 가는 꼼수 지침서를 만들고 있다”며 “개정 노조법을 무력화하는 사용자성 회피 매뉴얼과 노동부 해석지침을 폐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복잡한 절차에 발목 잡혀…‘입증 책임’ 부담
법 시행 100일이 되도록 제대로 된 교섭 사례가 나오지 않는 배경에는 복잡한 교섭 개시 절차가 있다. 원청이 7일 내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하지 않으면 먼저 노동위원회에서 원청의 사용자성과 공고 의무를 인정받아야 한다. 이후에도 노조법 시행령에 따라 한 사업장당 하나의 교섭대표노조를 정하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쳐야 교섭이 시작된다.
박현희 금속노조 법률원 부원장은 지난 5일 관련 토론회에서 “원청 기업들이 교섭요구 사실 공고를 거부하거나 불복 절차로 시간을 끌면서 교섭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며 “현행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와 교섭요구사실 미공고 강제수단의 부족 등이 결합해 노사 분쟁의 사법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자에게 부과된 사용자성 입증 책임도 걸림돌로 꼽힌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하청 노조는 원청 정규직 노조와 달리 원청이 사용자라는 것부터 입증해야 한다”며 “임금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도 증거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결국 산업안전 의제 중심으로 교섭 요구가 집중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정부가 원청교섭을 촉진하는 역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정부와 노동위원회가 교섭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며 “공공부문부터 교섭을 활성화해야 민간부문에서도 원청교섭이 정착될 수 있다”고 했다. 정기호 민주노총 법률원장도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는 직접 계약관계를 전제로 설계된 제도”라며 “노조법 시행령과 해석지침을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원청교섭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으면서 일부 하청 노조에서는 “언제까지 노동위원회 판단만 기다릴 수는 없다”며 생산라인을 멈추는 ‘라인 점거’나 파업 등 직접행동 필요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교섭 지연이 장기화하면서 원청교섭 문제는 올해 ‘하투(夏鬪)’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민주노총은 다음달 15일 총파업에서 노란봉투법 교섭 절차 개선과 원청교섭 보장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원청 정규직 노조와 하청 노조가 함께 참여하는 ‘원·하청 연대 투쟁’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