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의미’를 심은 선조들
1920년대 서울 행촌동 딜쿠샤 저택과 은행나무. 수령 400년은 족히 넘을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는 신통함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옛사람들이 공간에 부여한 의미
딜쿠샤 저택 앞 은행나무 고목
길흉사를 예고했다는 믿음도
대를 거듭하는 영원한 계승이란
상징성을 가진 아름드리나무엔
인간 공동체의 염원이 담겨있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개천이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 같은 멋진 정경이면 좋았겠지만, 1980년대 서울 변두리에서 그런 경치는 기대할 수 없었다.
동네 하수가 여과장치도 없이 콸콸 쏟아져 악취가 고약하던 그 개천을 아이들은 모두 ‘똥개천’이라 불렀다. 한때 이 개천이 맑아서 빨래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를 토박이 친구들에게 듣기도 했지만, 사실 그 친구들도 직접 본 적은 없을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였다.
더럽기는 했어도 개천은 다양한 생명을 품고 있었다. 봄이면 개구리가 깨어나고 제비가 날아들었으며, 가을이면 짝짓기하는 잠자리가 분주히 날아다녔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아름드리 수양버들 한 그루였다. 나무가 빈약하던 그 개천에 오직 그 수양버들 한 그루만 우뚝하게 서서 탐스럽게 버들가지를 드리웠다. 어디선가 밤에 수양버들을 본 선비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귀신으로 착각했다는 괴담을 들은 적이 있어서, 볼 때마다 귀신을 떠올리긴 했지만.
‘똥개천’의 풍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대 이른바 ‘마이카 시대’에 접어들면서 도시는 자동차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개천은 아스팔트로 복개되며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그와 함께 수양버들은 그루터기만 남고 베어져버렸다. 아쉬워할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 수양버들. 인상적인 나무기는 했어도 동네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전해지는 얘기를 들은 것도 없고 그 나무를 벤다고 동네 어른들이 신경 쓴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거나 범람을 막으려 흔히 강둑에 심던 버드나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물가 둔덕을 다지기 위해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하던 일이다. 한양의 경우에는 개천(서울 청계천)과 지대가 저습한 동대문 수구 인근이 문제였다. 영조는 개천을 준천하며 버드나무를 심어 양 둑을 다졌다. 동대문 수구 인근에도 버드나무가 많이 심겨 있어서 식목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똥개천’이 그랬듯이 나무가 있는 곳은 풍경이 좋아진다. 봄여름에 서울 사람들이 도성 40리를 한 바퀴 도는 순성 놀음을 할 때 이 일대의 버드나무 풍광은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꼽히곤 했다(<경도잡지>).
공간의 지표, 나무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공간에 남긴 표식이기도 하다. 옛날 사람들은 건물만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의미 있는 나무들을 함께 심곤 했다. 예를 들어 서울 성균관 명륜당의 뜰에 자리 잡은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는 ‘행단’에서 가르침을 실천한 공자를 상징하기 위해 심은 것이다.
창덕궁 춘당대가 가을마다 흐드러지게 붉게 물들어 ‘단풍정’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전각 앞에 단풍나무를 심어 궁궐을 풍신(楓宸)이나 풍폐(楓陛)라고 칭했던 중국 한나라의 고사를 따르고자 의도적으로 조성한 결과였다. 이렇게 심긴 나무들은 옛사람들의 그림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다. 19세기 창덕궁·창경궁을 그린 ‘동궐도’나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을 살펴보면, 그림 속에 묘사된 나무들 중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규모 있는 옛 건물 자리를 찾아다닐 때, 지형과 함께 나무들도 눈여겨 살펴보곤 한다.
향교나 객사 같은 지방 읍치의 주요 건물 주변에는 해당 건물과 나이가 비슷한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근현대를 거치며 건물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도 나무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들이 꽤 있어서, 나도 수령이 좀 돼 보이는 나무들을 보면 주변을 더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나무가 공간의 지표가 된 대표적 사례로 서울 행촌동의 딜쿠샤 저택을 들 수 있다. 딜쿠샤 저택은 앨버트 테일러(1875~1948) 부부가 1924년에 지은 집이다. 이곳은 1942년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집은 물론 주변 풍경도 너무나도 많이 달라진 상황에서 2006년 부부의 아들이 자신이 자란 이 저택을 찾을 때 지표가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인근에 있던 은행나무였다. 수령 400년은 족히 넘는다고 추정되는 이 나무는, 한 갑자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확실한 표지가 될 수 있었다.
2021년 복원된 딜쿠샤 저택 전경. 경향신문 자료사진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
딜쿠샤 저택 인근의 은행나무는 저택이 들어서기 전부터도 이미 행촌동의 명물이었다. 그래서 이 나무를 바짝 압박하며 지어진 딜쿠샤 저택이 못마땅한 동네 주민들이 많았다. 저택이 완성됐을 1924년, 행촌동 주민 이순익은 신문에 이렇게 기고했다. 이 나무가 태조가 심었다는 사직단의 노송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데다 보통 때는 열매가 맺지 않지만 나라에 큰일이 있으려면 열리는 신통함까지 지닌 나무인데, “지금은 코큰냥반의 울타리 속에 드러가서” “어느 몹슬 놈이 나를 파러 먹언노” 하며 궂은비를 눈물 삼아 뿌리고 있다고(동아일보 1924년 7월14일자).
행촌동 은행나무가 그렇게 여겨진 것처럼, 사람들은 나무가 미래를 예고하는 징조를 보인다고 생각하곤 했다. 서울 서소문동에 있던 퇴계 이황 옛집의 전나무가 그러했다. 키가 수십 길이나 되던 이 전나무는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큰 나무들이 다 없어지는 속에서도 홀로 살아남아 푸르른 위용을 자랑하다, 1611년(광해군 3) 봄 갑자기 부러져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인홍(1535~1623)이 주동한, 퇴계 이황을 비방하는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한경지략>). 전나무가 부러진 사태는 훗날 ‘회퇴변척’(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비방하며 배척한 사건)이라 불리게 될 사건을 예고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무가 이렇게 부정적인 사안만 예고한 것은 아니다. 경복궁 집현전 남쪽에는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세종 말년에 흰 참새가 와서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은 일이 있었다. 이는 좋은 일이 있을 징조로 여겨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수년 동안 집현전을 통해 이루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다(<한경지략>).
인간보다 오래 사는 나무는 대를 거듭하는, 영원한 계승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선조가 심은 나무를 귀하게 여기며, 혹시라도 죽으면 새로 심기도 했다. 창덕궁 이문원 뜰에는 이철보(1691~1775)가 심은 홰나무 한 쌍이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중 한 그루가 말라 죽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규장각의 제학이 된 이만수(1752~1820)는 죽은 나무를 대신해 어린 홰나무 한 그루를 보충해 심었다. 그는 이철보의 손자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소유권이 변동될 때 나무를 새로 심고 이름을 바꾸면서 계승의 상징성을 탈취하거나 덧씌우는 일도 발생한다. 남산 쌍회정의 이름은 원래 이항복(1556~1618)이 심은 전나무 두 그루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곳을 매입한 서염순(1800~?)은 단풍나무를 많이 심고 정자 이름을 ‘홍엽정’이라고 바꾸었다. 훗날 이항복의 9세손인 이유원(1814~1888)은 이곳을 사들이고선 다시 쌍회정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렇다고 홍엽정 시절 심긴 단풍나무를 없애진 않은 듯하다. 이 일대는 단풍이 좋기로 유명했다.
나무에 이렇듯 여러 가지 의미가 부여되다 보니, 옛날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않았다. 창덕궁 서편은 원래 유희경(1545~1636)이란 사람의 집터였다가 궁궐로 포함된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100여명이 앉을 만큼 그늘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전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정조 대 규장각의 대유재를 지을 때까지도 그대로 남아 이곳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일단 명물이 된 나무는 설령 죽더라도 그냥 버려지지 않았다. 삼청동 장원서 뜰에는 성삼문이 직접 심었다는 소나무가 있었으나 언젠가 말라 죽었는데, 그 고목은 거문고의 재료가 됐다(<한경지략>).
‘옛사람들은 역시 현대인과는 달리 자연을 사랑했나 보다’ 같은 흔한 감상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다. 대체로는 ‘옛날의 지금과 다름’에 주목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작업이지만, 때로는 이러한 역사화가 지나쳐 지금의 우리를 도리어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 다름보다는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을 주목하고 싶다. 나보다 오래 사는 생명체에 대해 원초적 경외감을 품는 존재, 서사를 만들어내며 자연스럽게 상징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같은. 아름드리나무가 죽어갈 때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물성으로서의 나무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와 애착을 부여한 공동체가 공격받고 인간의 본성을 부정당하는 느낌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