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가 부족한 투표소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민주주의 훼손에 분노한 이들이 모이며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시위에서 민주주의를 흔들어대던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두 개의 역설을 낳았기 때문이다.
‘한 표’의 역설. 투표용지 부족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잘못된 일이다. 누군가 자신의 한 표로 민주적 절차에 참여할 기회를 제한당했다. 그런데 선거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제도다. 당선자를 가리는 과정으로 볼 수 없지만 당선자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잘못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한 표’의 형식과 의미가 괴리되어 잘못되었으나 잘못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잘못됐지만 ‘저렇게까지’ 들고일어날 일인지 수긍되지 않는 사람들과, 잘못됐는데 ‘저렇게까지’ 한가한 현실이 납득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물음표가 쌓여갔다.
‘재선거’의 역설. 사태 해결은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면 안 됐다. 잠실에 모인 사람들은 부정선거 아니라 재선거만 외치자고 서로를 설득했다. 사태 이후 쏟아져나온 대학 성명들에 매우 낮은 비중이었던 재선거 요구는, 선거가 잘못됐으니 다시 하자는 자연스러운 감각을 따라 확산되었다. 그런데 부정선거는 재선거의 논리적 선행물이다. 부정선거 주장을 해오던 이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시위의 구호는 ‘부정선거 재선거’가 되었다. 부정선거와 선 그으려던 노력이 부정선거론을 만나게 했다.
시위가 잦아든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선관위가 빌미를 제공한 셈이니, 12·3 내란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해낸 시민들에게 이렇듯 지독한 배신도 없다. 그래도 다시 우리가, 민주주의를 구출해야 한다.
첫째, 재선거는 해법이 되기 어렵다. 재선거는 기존의 선거를 무효화하자는 요구다. 후보 출마, 선거운동, 고심 끝의 투표 등 모든 노고를 ‘없던 일’로 만든다. 선관위의 잘못으로 선거 전체가 잘못된 것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다시 투표하자는 말은 모순에 빠진다. 결과에 영향이 없다면 투표는 요식행위가 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든든한 구성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거의 의미를 지우는 요구를 할 수는 없다. 선관위에 매 드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 듯 내부 다툼에 바쁜 더불어민주당이나, 당대표의 무책임한 주장을 방치하며 유불리만 따지는 국민의힘은 신뢰 회복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둘째, 선관위의 잘못을 ‘부족한 투표용지’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 선관위의 잘못은 종이 한 장에 실린 참정권의 무게를 망각한 데 있다. 선거가 끝나면 휴지조각이 될지라도 그 한 장의 무게를 가벼이 하지 않으려 시민들은 노력했다. 권리이자 책임으로 여기며 한 장에 실린 뜻과 마음이 작은 변화로 이어지리라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선관위는 믿음을 부쉈다. 투표용지 인쇄 적정량을 잘 예측하는 것이 재발방지 대책의 전부일 수는 없다. 선관위의 역할이 참정권 증진에 있음을 깨닫고 그 방안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참정권의 질문도 확대되어야 한다. 투표권이 있어도 투표하러 갈 수 없는 사람들, 후보가 한 명이라 투표를 못하게 되는 사람들, 아직 투표권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너머까지.
셋째,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았다. 두 개의 역설은 더욱 심대한 정치의 위기를 반영한다. ‘한 표’의 의미는 이미 희미해지고 선거는 떠들썩한 형식만 남아왔다. 나의 한 표가 나의 삶과 연결되지 않고, 반복되는 선거는 사회를 더 낫게 이끌지 못했다. 많은 청년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정치는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따지며 상대를 부수느라 여념이 없었고 삶의 위기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정당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정치를 할 뿐 보편적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어느 편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늘었다. 정치적 중립이 가장 정치적인 실천이 되어가는 역설 위에서 정치 지형은 지극히 불안정해지고 민주주의는 길을 잃어왔다.
환멸의 세계에서 다행히 한 표를 냉소하지 않은 이들이 지금 분노하고 있다. 선관위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고 우리는 다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민주당이냐 국민의힘이냐에 가두는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중립이 아닌 미래로 길을 낼 정치가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순간 거리로 나왔던 당신과 함께, 우리 꼭 해내자고.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