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중앙홀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는 저울, 왼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한수빈 기자
“신념 따르다가도 시비 걱정”
전향 판결·기소 위축 내비쳐
대법·헌재 사이 갈등도 심화
로펌은 전문팀 신설 등 ‘특수’
“이○○ 검사, 법왜곡죄로 당신을 감방에 처넣겠습니다. 당신은 검찰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사법경찰관 경감 구△△는 정말 쓰레기도 안 됩니다.”
극우 성향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 운영자 김세의씨는 배우 김수현씨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 위기에 몰리자 지난달 20일 방송에서 담당 검사와 경찰관을 법왜곡죄로 고소하겠다고 예고했다. 유튜버 ‘구제역’(본명 이준희)은 유튜버 ‘쯔양’(본명 박정원)을 협박해 돈을 갈취한 혐의로 지난 3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확정받자 “억울함을 밝혀달라”며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김씨는 구속됐고 구제역의 재판소원은 각하됐다.
정부·여당의 사법개혁 정책인 법왜곡죄와 재판소원이 19일로 시행 100일을 맞는다. 법왜곡죄는 판검사와 수사관 등이 의도적으로 잘못된 법령을 적용하거나 조작된 증거를 사용해 형사사건 재판과 수사 결과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면 처벌하는 죄목이다. 재판소원은 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가 위헌 여부를 판단해 취소할 수 있는 제도이다.
18일 취재를 종합하면 법왜곡죄와 재판소원 제도는 잘못된 수사·기소·재판으로부터 시민의 기본권을 지키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판검사들은 법왜곡죄 때문에 시대 변화를 반영해 새로운 법리를 제시하는 진보적 판결과 기소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고위 법관인 A판사는 “과거에는 하급심 판사가 자신의 신념대로 대법원 판례에 어긋나는 판결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런 판결이 나오면 법왜곡죄로 고발당할 수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일선 지방법원 형사부에서 근무하는 B부장판사도 “아무래도 전향적이거나 적극적인 판결문을 쓰면 시비가 생길까봐 걱정된다”며 “유죄가 안 되더라도 일단 법왜곡죄에 말려드는 것 자체가 싫다”고 했다.
검찰도 일선 검사들이 새로운 법리 적용에 소극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원래 폭력조직 처벌에 주로 쓰이던 ‘범죄단체조직죄’를 보이스피싱 조직에 적용한 사례처럼 전례에서 벗어난 수사·기소가 법왜곡죄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C차장검사는 “법왜곡죄 조항이 모호하고 광범위해 범죄자들이 얼마든지 법왜곡을 주장할 수 있다”며 “검사가 불법 행위 처벌에 다양한 법을 적용해보려는 노력이 줄어들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불신’에 ‘불복’ 겹쳐…대상 되는지도 안 보고 고발장부터
판검사 겨냥해 제정한 법왜곡죄
정작 경찰들이 가장 많이 피소
“진짜 기본권에 도움이 되나 의문”
‘판결 견제 장치’ 재판소원 제도는
기준·절차 등 미비로 정착 ‘아직’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법왜곡죄에 대해 “판사나 검사가 증거를 조작하거나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며 찬성했다. 그러나 정작 법왜곡죄로 가장 많이 고소·고발당한 대상은 판검사가 아니라 경찰이다.
경찰이 지난달 6일 기준 접수한 법왜곡죄 사건은 5805건이고 이 중 혐의가 인정돼 송치된 사건은 ‘0건’이었다. 피소 대상은 경찰이 1566명(27.0%)으로 가장 많았다. 검사는 376명(6.5%), 판사는 242명(4.2%)이었다. 법왜곡죄 적용 대상이 아닌 비신분자도 3464명(59.6%)에 달했다.
지방경찰청에 근무하는 D수사관은 “똑같은 증거를 두고도 검사와 경찰수사팀 의견이 갈릴 수 있는데, 다 법왜곡으로 몰고 가버리면 수사 자체가 힘들어진다”며 “현장 입장에선 ‘이게 진짜 국민 기본권 구제에 도움이 되나’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재판소원을 두고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갈등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대법원은 재판소원이 사실상 ‘4심제’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된다고 주장한다. 헌재는 법원 판결도 헌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7일 다른 형사사건 재판 피고인이 제기한 헌법소원 심리가 지연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헌재에 의견을 요구했다.
많은 인권변호사는 ‘무오류의 존재’처럼 여겨졌던 대법원 판결을 견제할 수 있다며 재판소원에 찬성한다. 하지만 사전심사를 통과해 헌재 전원재판부에 회부된 사건은 지난 8일까지 8건으로 접수 사건(877건)의 1%도 되지 않는다. 헌재가 재판소원을 인용할 경우 후속 절차도 정해지지 않았다.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법원 스스로 헌법적 가치를 점검하게 한다는 면에서 재판소원이 필요하다고 본다”면서도 “심사 기준이나 후속 절차를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채 시행해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변호사 업계에선 법왜곡죄와 재판소원으로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재판소원 도입 이후 대형 로펌들은 앞다퉈 전문팀을 구성했다.
대형 로펌 소속 E변호사는 “그야말로 장이 섰다”고 평가했다. 이 변호사는 “과거에는 헌법연구관들이 학계 말고는 갈 데가 없었는데 하나둘씩 로펌의 높은 자리로 취직하더라”며 “헌재는 조직이 작아서 근무한 분들도 많지 않으니 몸값도 그만큼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