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최대의 악당이 나타났다. 선거관리위원회다. 이 악당이 끼친 가장 큰 해악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시민의 주권을 지키는 제도에 대한 신뢰를 붕괴시켜 음모론이 번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음모론은 민주주의와 사회를 지탱시키는 믿음의 체계로서의 신뢰가 붕괴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는 유사 신앙의 믿음 체계이다.
신뢰와 신앙은 둘 다 ‘믿음’이지만 완전히 다른 ‘믿음’이다. 신앙적인 믿음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근거가 된다. 신을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별과 울려 퍼지는 뇌성’이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읽힌다. 모든 것이 근거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근거는 필요 없다.
신앙이란 믿음은 틀릴 리가 없고 틀릴 수도 없다. “그럴 리 없다”가 신앙의 핵심이다. 대상이 틀릴 수 있다고 의심하고 회의하는 순간 신앙은 무너진다. 극단적 종교집단에서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요구되는 것도 이런 속성을 보여준다. 반면 신뢰는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막연한 신뢰는 없다. 신뢰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가 여러 차례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충실하게 지켰다는 분명한 근거가 있고 그 근거가 한 번이 아니라 충분히 축적되었을 때 신뢰한다고 말한다.
신뢰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류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태도다. 신뢰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언제든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신속하게 수정할 때 제도에 대한 신뢰는 단단해진다. 신뢰는 신앙과 달리 오류가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수정하여 바로 잡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여야, 선관위 사태 뒷전…내부 정쟁만
반대로 제도의 수정 가능성을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뒤에 뭔가가 있다는 음모론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 때문에 서울여대 유지윤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음모론자들은 기를 쓰고 문제가 벌어지면 그것이 제도의 ‘오류’가 아니라 ‘질서의 붕괴’라고 담론화한다. 요컨대 지금 선관위에 의해 저질러진 사태는 수정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지금의 시스템 전체가 부패하여 자유민주주의라는 질서 자체가 붕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제도가 안이하거나 무능하거나 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선관위라는 제도야말로 이 무질서를 획책하는 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핵심적 장치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제도가 스스로 반성하고 오류를 재빨리 수정하면 사태는 수습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선관위가 보이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의심과 회의를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면 선관위라는 제도를 둘러싼 더 큰 제도인 시스템이 이 오류를 인정하고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 사건을 민주주의 공화정의 가장 근본인 주권 행사에서 벌어진 근본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시스템이 이 문제를 수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태가 선관위라는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이 공모하여 주권자를 ‘능멸’하는, 즉 민주주의 공화정이라는 질서 붕괴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음모론으로만 치부하고 여당이건 야당이건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에만 여념이 없다. 가장 중요한 근본에 대한 신뢰를 재구축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음모론은 제도와 시스템의 오류에 대해 비밀스러운 배후가 있다는 망상적인 ‘음모론’이 아니라 시스템이 주권을 유린하고 질서를 붕괴시키는 것에 대한 ‘내부 폭로’가 된다. 음모론이 대중에게 ‘내부 폭로’로 인식되면 그건 틀린 것이 아니라 ‘과한’ 것이 된다. 계엄이 다소 과격한 계몽이었고 “윤석열이 옳았다”는 말이 바로 그 의미다.
물론 한국의 다수 시민이 윤석열을 내부 폭로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를 내부 폭로자로 미화하는 한, 부정선거 음모론이 다수 대중에게 확산되기도 쉽지 않다. 이들의 언어는 대부분 자기 세계와 신앙에 갇혀 흔들리는 대중을 유혹하는 게 아니라 윽박지르고 밀어내고 있다. 자기 신앙을 강요하며 다른 모든 언어를 이단시하여 배척한다. 폐쇄적 언어로 무장한 이들이 세력을 대중으로 확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지금 한국의 음모론에는 딱 하나, 타인의 언어로 말하며 신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대단한 선동가’가 없을 뿐이다.
민주주의 불신으로 번지게 둘 건가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이런 선동가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전에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은 명확하다. 선관위라는 핵심적인 하나의 제도에 대한 신뢰가 붕괴했다면 국가 시스템 전체가 나서서 오류를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게 정치의 역할이다. 제도에 대한 신뢰를 다시 구축하는 정치가 발동되어야 하고 그 모습을 보이는 정치인에게 ‘다음’이 있어야 한다.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