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실무자를 힘들게 하는 상사는 권한과 책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대리-차장-부장-임원 등 직급에 따라 부여된 권한과 책임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장인데 대리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반대로 임원인 것처럼 행동하는 상사만큼 답답한 상사는 없다. 그중 최악의 사례는 권한은 부여된 것보다 더 누리려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유형이다. 수많은 사고는 이런 무책임이 겹겹이 쌓여서 벌어진다.
선거관리위원회 사태도 권한과 책임의 불균형이라는 렌즈로 읽어야 한다. 중립성과 독립성을 무기로 삼은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이 특수성을 방패 삼아 외부 감사나 견제로부터 자유로운 권한을 누려왔다. 반면 권한에 비례한 책임 구조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직원 자녀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졌을 때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구라는 이유로 감사원의 직무감찰에 반발하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고, 헌재는 선관위 손을 들어줬다. 권한만 누리고 책임은 없는 상태에서 불과 1년여 뒤 다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터졌다. 경고음이 계속 울렸음에도 우리 사회가 선관위의 권한에 걸맞은 책임 구조를 만들지 못했고 결국 사고를 막지 못한 셈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도 권한과 책임을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9일 유럽·주요 7개국 순방 결과 브리핑에서 검찰의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 논란을 두고 국회에서 논의해 결론 내달라며 “권한을 줬으니 책임도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일부 강경 지지층은 보완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부 의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강성 지지층의 항의가 두려워 말도 꺼내지 못한다.
검찰 수사는 문제가 많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사권 조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논의에는 핵심 질문이 빠졌다. 수사권 조정이 불완전하게 이뤄져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질 것인가다. 제도 개혁을 밀어붙이는 이들에게 거대한 권력기관 개편을 요구할 힘은 있을지언정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의 공백을 책임질 능력과 대안이 있는가. 국회가 입법 권한만을 내세운다면 입법 결과로 생겨날 수 있는 모든 부작용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가. 정책 결과를 책임지는 건 지지층이 아니라 정치인의 몫이다.
과거 세계에서 유례없는 압축 성장을 해낸 한국의 성장 방정식은 속도였다. 속도가 최고의 미덕이었던 시절에는 권한에 걸맞은 책임 구조를 고민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된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감정적 구호나 선동만으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크기의 나라가 됐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시급한 숙제는 사회 곳곳에서 권한에 비례하는 책임 구조를 짜는 일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과를 내기 위한 ‘결정의 속도’가 아니라 결과를 끝까지 감당하는 ‘책임의 밀도’다.
정치는 이 권한과 책임의 재정립을 이끌어야 하는 선봉대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진정한 책임은 거악에 맞서 투쟁하는 정의로운 태도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자신의 권한의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그 권한 행사에 따른 효용과 사회적 비용을 치밀하게 따져보는 데서 나온다.
임아영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