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을 극복하고 집권 1년을 맞는 선거는 정부가 시민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는 무대였다. 그런데도 집권당 대표가 내란청산이란 철 지난 구호를 내세워 선거를 망쳐놓았다. 그는 당대표가 된 순간부터 야당을 설득해 현안을 해결하는 본연의 역할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진영의 전사다. 그런 사람이 다시 당권을 쥐겠다고 한다. 누군가 그를 말려야 한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나설 일은 아니다. 한국 정치에는 대통령이 당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권력을 제한하는 정치 규범이 있다. 당정분리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이 규범에 철저했다. 집권당 대표를 부하처럼 부리는 건 민주당답지 않은 일이다. 굳이 선거 책임을 따지자면, 이재명 몫이 가장 크다. 선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에 그가 있었다.
종종 대통령들은 힘이 없다며 무력감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제왕적 권력을 우려해 분권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내란극복·민주주의 수호의 정치적 자산을 가진 이재명 정부에서 1인 통치, 권력 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 이재명 정부에는 이재명뿐이다. 총리와 그 많은 장관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비서실장은 해외를 떠돈다. 국무위원들은 국정 방향을 논하는 대신 5급 공무원처럼 대통령이 쏟아내는 깨알 같은 질문과 지시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이재명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각이 아니라 소셜미디어(SNS) 같다. 아니 그에게는 SNS가 내각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내게 권력과 소셜미디어 계정만 달라. 그러면 국가 하나를 통치할 수 있다.’
1인 통치는 정권을 건 고위험 감수 게임이다. 온갖 문제에서 존재감을 과시한 대가로, 모든 불만·짜증·사고가 대통령 한 사람의 책임으로 귀결될 수 있다. 모든 원망이 한 사람에게 폭주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강한 권력도 감당할 재간이 없다.
그래도 지난 1년은 괜찮았다. 사람들은 이재명의 속도감과 행정적 성과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선거 이후의 세상은 선거 전의 세상과 같지 않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저 유명한 첫 문장 그대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우리는 선거라는 터널을 통과해 전혀 다른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돌아갈 수 없다.
다른 세상에서 행정능력은 기본값이다. 그것만으로 점수를 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이 국정운영 지침으로 통합·관용·포용·큰 그릇을 제시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관용·포용은 먼저 관용·포용의 언어로 나타나야 한다. 국민의힘 원내대표 정점식이 “코스피 9000에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자 이재명은 즉각 반격했다. “내가 언제 자화자찬했나,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라.” 이건 포용의 언어가 아니다. ‘야당 의견에 공감한다. 우리가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 여야가 머리 맞대고 자산 양극화 해법을 찾아보자.’ 이게 포용의 언어고, 포용의 첫걸음이다.
다른 세상에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적절했는지, 공정성을 해쳤는지, 권력을 남용했는지 시민들은 더 냉정하게 따진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 웬만하면 곱게 봐주던 것도 이제는 엄격해졌다.
이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한다. 우선 당대표 경선에서 손을 떼야 한다. 적극 개입에도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리더십은 흔들리고 국정이 불안정해진다. 총리·장관에게는 합당한 권한이 부여돼야 한다.
뭐니뭐니 해도 이재명에게 닥칠 가장 큰 위험은 ‘공소취소’다.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릴 만큼 폭발력이 크다. 공정에 대한 시선이 날카로워진 상황에서 권력을 가졌다고 내 재판만 없던 일로 해달라는 게 먹힐 수 없다. 법원도 여권이 공소취소의 핵심 근거로 삼은 ‘연어 술파티’ 의혹이 허위라고 판단했다. 이재명은 퇴임 후 당당히 재판받겠노라고 천명해야 한다.
이재명이 적당한 거리에서 세상을 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이재명과 세상 사이가 너무 가깝다. 모든 일이 다 중하고 급한 것은 아니다. 경중완급을 가려야 한다. 여백이 필요하다. 언젠간 가장 발언권 강한 사람이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에 시민이 싫증 낼 수도 있다. 침묵도 발언이다. 리듬을 타라!
그는 말했다. “나는 선거 전후로 변한 게 없는데 국정 지지율이 폭락했다.” 맞다. 변한 것은 이재명이 아니라 시민이다. 이제 이재명이 변해야 한다.
이대근 우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