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율립 함승용·하주희 변호사와 가수 이랑씨, 강상우 감독(왼쪽부터)이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율립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기 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소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중
가수 이랑씨는 윤석열 정부 시절인 2022년 10월 열린 제43회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식에서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르기로 했지만 무대에 서지 못했다. 공연을 3주 앞두고 주최 측은 이씨에게 “행안부 윗선에서 노래 교체를 원한다. 이 노래는 공연에서 빼라”고 했다. 이를 거부하자 행안부는 이씨를 빼고 공연을 진행했다.
이씨는 행안부의 개입이 “명백한 검열”이라며 정부와 부마항쟁기념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지난 10일 “정부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곡 변경을 강요한 것은 예술인의 인격적 이익을 침해한 불법행위”라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노래 검열 의혹’을 폭로한 지 약 4년 만이다.
이씨는 지난 22일 경향신문과 만나 “처음 소송을 낼 때 주변 모든 사람들이 ‘왜 힘든 길을 하려고 하냐’며 말렸고, 나도 겁이 났다”라며 “결국 이겨서 다른 예술인들이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선례를 남기게 돼 뿌듯하다”고 밝혔다.
행안부 압박에 ‘알아서 움츠린’ 재단…“윤석열 심기 경호하려 비상식적 요구”
이씨와 함께 소송의 원고로 참여한 강상우 감독은 ‘노래를 교체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면서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재단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윤석열씨 한명의 ‘심기경호’를 위해 벌어진 일이구나.”
하주희 변호사, 가수 이랑, 강상우 감독이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율립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총연출직을 한차례 고사했던 강 감독은 “대통령실이나 정부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는 재단의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초반 준비 과정은 순조로웠다. 강 감독은 부마항쟁을 경험한 기성세대가 아닌 ‘항쟁 이후 세대를 위한 새로운 기념식’을 기획해 이씨를 공연자로 정했다. 재단도 직접 나서 “이 노래가 공연된다면 가장 공식적인 곳에서 가장 소외된 이야기를 전하는 귀중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이씨를 설득한 끝에 공연이 성사됐다. 행안부 보고를 거쳐 기획안은 확정됐고,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행사에 참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재단은 수시로 ‘정부의 의중’을 언급하며 노래를 바꾸라고 했다. 여러 번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재단은 “(행안부 쪽에서) 늑대가 VIP를 상징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행안부 윗선이 노래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행안부가 재단 예산의 목줄을 잡고 있어 메시지를 관철할 수가 없다”는 두루뭉술한 설명만 반복했다. 이에 관해 강 감독은 “협업 과정에서 받을 수 있는 요청이 아니라 일종의 협박으로 느껴졌고, 절차적으로도 합리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승소 판결로…“어떤 명분으로도 예술활동 위축 안 돼”
행안부의 요청이 부당하다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법정에서 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았다. 배상 책임이 인정되려면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는데, 당시 행안부의 존재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인단은 우선 행안부 쪽과 소통했던 재단 직원 이모씨의 증언을 듣기 위해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당시 재단에서 퇴사한 상태였던 이씨는 증인으로 나와 “행안부 곡 변경 요구가 압박 내지 협박으로 느껴졌고 이는 불법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은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예술인권리보장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 법은 예술인의 권리 침해를 폭넓게 구제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져 2022년부터 시행됐다.
이씨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는 행안부의 요구가 예술인권리법 13조1항을 위반했다고 보고 “정부의 곡 변경 요구는 객관적 정당성이 없는 위법행위이므로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 조항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예술인에게 불공정한 계약 조건을 강요하거나 계약 조건과 다른 활동을 강요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소송을 대리한 하주희 변호사(법무법인 율립)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겪은 선배들의 활동 덕에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제정됐고, 이를 토대로 정부가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예술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은 불법이라는 점을 확인한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함승용 변호사도 “독재 정권에서나 있었던 사전 검열 의혹이 불거진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인데,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 나와 다행스럽다”며 “이런 판례들이 쌓이면서 ‘이런 일은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사회의 기준도 점차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 감독은 “이번 사건이 특정 정권이 악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거나, 다른 정권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12·3 불법계엄 때도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불법적이고 비합리적인 지시를 거역할 권리를 보장하는 명확한 지침이 사회 전반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긴 소송을 끝낸 이씨는 “이제라도 ‘저희가 2022년 그때는 정말 잘못했습니다’는 인정과 사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아직 항소장을 내지 않았다. 항소 기한은 다음달 2일까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