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난민 본국 송환, 인권 침해 우려”
23일(현지시간) 브뤼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본부 앞에서 국제앰네스티 활동가가 탈레반 대표단과의 회담에 항의하며 “탈레반과의 협상을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는 탈레반 당국자들을 브뤼셀로 초청해 이주민 송환 문제 등을 논의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여성과 소수자 탄압을 이어온 탈레반과의 접촉이 EU의 인권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EU는 23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탈레반 당국자들과 비공개 회동을 진행했다. 탈레반이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재집권한 이후 EU가 탈레반 관계자들을 브뤼셀로 초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회동은 지난 1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열린 EU와 탈레반 간 첫 공식 접촉의 후속 협의 성격으로 알려졌다. 다만 EU는 정치 지도자급 회담이 아닌 실무 협의이며, 탈레반 정권을 외교적으로 인정하는 의미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회의 역시 EU 공식 건물이 아닌 별도 장소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EU는 최근 유럽 각국에서 반이민 정서가 확산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의 송환 문제를 논의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dpa통신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반난민 정서와 맞물려 아프간 난민 송환 문제 해결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는 회원국들의 요구가 커짐에 따라 탈레반 당국자들을 브뤼셀로 초청하기로 했다.
지난해 3월2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탈레반 보안 요원이 경비를 서고 있는 가운데,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들이 이슬람 성월인 라마단 동안 기증된 식량을 받기 위해 폭우 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AF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인은 현재 EU 내 망명 신청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 중 하나다. 이날 회담에서도 유럽에 체류 중인 아프간 이주민들의 본국 송환 문제가 핵심 의제로 다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아프가니스탄 외무부는 이번 브뤼셀 방문을 “역사적인 여정”이라고 규정하며 양측이 “생산적인 논의”를 했다고 자평했다. 아프간 측은 유럽 거주 자국민에 대한 영사 서비스 재개와 존엄성이 보장되는 송환 절차 등을 집중적으로 협의했다고 설명했다.
브뤼셀을 방문한 탈레반 대표단 5명에게는 벨기에 정부가 자국 체류에만 유효한 당일 비자를 발급했다. 막심 프레보 벨기에 외무장관은 애초 인권 문제와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입국에 부정적 입장이었지만, EU의 요청에 따라 비자를 발급했다고 밝혔다.
인권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이번 회담이 EU의 인권 원칙을 약화하고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탈레반은 재집권 이후 여성의 이동을 제한하고 중등교육을 사실상 금지하는 한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등 강경한 이슬람 율법 통치를 이어오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간 난민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심각한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리처드 베넷 유엔 아프간 인권 특별보고관은 “브뤼셀에서 탈레반과 회담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인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파키스탄 출신의 여성 인권 활동가인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엑스에 “EU가 탈레반과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유럽은 세계 최악의 인권 위기에 책임이 있는 정권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