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업동력이 안갯속인 한국 경제에 K컬처는 든든한 빛이다. 정부는 문화산업 매출을 2030년까지 400조원 규모로 확대하겠다고 한다. 첨단산업을 키우려면 기초과학 투자가 필요하듯, 문화예술산업을 키우려면 순수예술 투자가 필수적이다. 디자인·영상·게임 등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의 원천지식으로 삼을 수 있도록 혁신적 예술의 토양을 가꾸는 것이다. 예술인의 창작 여건 개선에 대한 접근 방식이 기존의 시혜적 관점을 넘어 사회적 가치투자로 대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문화 선진국들은 예술인들의 노동가치를 인정하고 창작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여러 지원책을 두고 있다. 예로, 문화예술 종사자가 100만명인 프랑스는 ‘앵테르미탕’ 제도를 운영 중이다. 12개월간 507시간 이상 노동을 증빙하면 공연·영상 예술가 및 기술자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한다. 독일은 1983년 ‘예술인 사회보험’(KSK)을 도입했다. 예술인이 50%, 국가가 20%, 고용기업이 30%의 보험료를 부담하는 사회연대 방식이다. 오늘날 독일 문화계의 부흥으로 이어진 성공적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순수예술 지원, 고부가가치 투자
문화산업 원천지식 토양 가꿔야
촘촘한 예술인 사회안전망으로
‘글로벌 초격차’ 기초예술 육성을
아일랜드의 ‘예술인 기본소득’(BIA)은 가장 진보적이다. 자격요건을 갖춘 예술인 가운데 추첨 선발된 2000명에게 2022년부터 3년간 매주 325유로(57만원)를 실험적으로 지원했다. 예술인들은 활동증빙이나 생계 걱정 없이 창작에 매진했다. 덕분에 본업과 무관한 ‘N잡러’로 일하는 시간은 통제집단에 비해 주당 2.7시간 감소하고, 6개월간 신작을 완성할 확률은 7.7%포인트 높아졌다고 한다. 아일랜드 정부는 올해 BIA를 상시 제도로 삼고, 지난달 2기 선발에 나섰다. 예술인들에 대한 투자가 비용을 상쇄하는 높은 부가가치를 낸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국내 예술인의 현실은 어떤가. 국가복지의 문턱을 넘는 데 필요한 ‘예술활동증명’은 하기도 받기도 쉽지 않다. 실적 중심의 까다로운 증빙 절차는 젊은 예술인의 진입을 가로막는다. 지원은 단절적이고, 사회안전망 사각지대는 여전하다. 2011년 생활고로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가 사망한 이후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됐으나 갈 길이 멀다. 상대적 빈곤 규모는 일반 임금근로자의 약 3배이고, 소득배율로 따져본 예술계의 양극화는 같은 비교 대상의 4배 이상에 달한다.
한때 진정한 예술가는 궁핍한 현실에서 예술적 영감을 퍼올린다는 낭만주의 신화가 만연했으나, 폐기된 지 오래다. 문화 선진국들은 예술가들이 가난에 시달리지 않을 때 혁신적인 창조에 도달한다는 결론에 기반해 지원한다. 이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의 예술이 직면한 과제이자, 한국의 기간산업으로 떠오른 문화예술의 과제이다. 두려움 없이 기존의 문법을 새로 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인들이 창작에 몰입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그중 하나는 예술인 ‘참여소득’이다. 공공의 자산이 되는 예술인들의 창작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주는 것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지난해 펴낸 <예술인 창작 여건 개선방안 연구>에서 제시한 모델 중 하나는 예술활동증명 예술인 가운데 만 20~39세이고, 중위소득 120% 이하인 저소득 청년 예술인 약 2만5000명에게 월 100만원씩 지급하는 것이다. 초기 커리어 형성을 지원해 중도 탈락을 막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면 전 연령층에게 더 적은 금액이라도 지원하는 로드맵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백남준을 비롯한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도들을 감행했다. 이는 오늘날 ‘에스파’ ‘블랙핑크’를 비롯한 K팝의 세련된 뮤직비디오 문법과 무대연출의 원천기술을 이뤘다. 반도체 특수로 얻은 국가적 부를 미래 신성장동력인 예술인재 양성에 과감히 재투자한다면, ‘글로벌 초격차 성장동력’을 만들겠다는 정부의 목표와도 정확하게 부합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문화입국’이라는 전략적 투자정책으로 오늘날 K컬처가 번영할 토대를 놓았다. 이재명 정부 또한 이 같은 거시적 안목으로 K컬처의 유통기한을 늘릴 미래 전략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최민영 문화·오피니언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