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는 끝났지만 후폭풍이 여전하다. 당선인들은 ‘잘해보겠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지만 선거관리위원회의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응을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투표용지를 부족하게 인쇄했고, 왜 그토록 대책도 부실했던 것일까?
여러 매체는 이를 감시받지 않는 권력의 폭주, 제대로 일하지 않아도 봉급받고 누릴 것 다 누려온 타성 때문이라고들 한다. 질 낮은 공무원들이 가지는 전형적인 병폐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그런 공무원의 전형을 만난 적이 있다.
1978년 교육대학을 졸업한 지 2년3개월 만에 완도의 어느 섬으로 발령을 받았다. 학교에 가서 처음 깨달은 것은 선생님이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문을 작성하고, 교장·교감의 설교를 듣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다섯 분인 6학급짜리 학교라 내가 맡은 사무만 해도 거의 열 가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업무 중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비품 관리였다. 학교의 모든 물품을 조사해 파손된 물품 등을 처리해서 이를 돈으로 환산해 장부에 기록·관리하는 일이었다. 발령받은 지 두 달 만에 비품 현황을 기다란 장부로 만들어 교육청에 제출하러 가야 했다. 탱크와 미사일부터 종이와 이쑤시개까지 모조리 망라한 노란 표지의 ‘정부물품분류표’를 뒤적이며 장부를 작성해 그것을 들고 교육청에 갔을 때 나는 그를 만났다.
널따란 교육청 회의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은 하위직 공무원인 주사였다. 장부 보따리를 들고 온 선생님들은 그의 앞에 서서 차례대로 장부를 내밀었다. 주사는 전년도 장부를 펼쳐 숫자를 하나하나 대조해보더니 거의 대부분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순간 나는 갈등했다. 관공서의 공문은 대개 그렇듯이 형식이 문제지 내용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한번 봐달라고 말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학교에 돌아오자 교감은 가르쳐준 적도 없으면서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수치심보다 일종의 절망감이었다. 교육을 둘러싼 시스템 전체에 대한 환멸이었다. 이는 훗날 교직을 떠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장부를 고쳐 다시 교육청에 갔다가 교대 선배들을 입구에서 만났다. 사정을 들은 선배들은 걱정하지 말고 저녁에 보자고 했다. 그날 밤 선배들이 부른 술집에 갔더니 그 주사가 와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던 중 주사는 내게 말했다. “왜 좀 봐달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갔느냐? 세상을 그렇게 살면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1년에 3억원의 예산을 다룬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다음날 장부는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됐다. 공권력이 어떻게 사유화되고, 왜곡 행사되는지를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 주사는 이후 내가 만난 질 나쁜 인간들에 비하면 최악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도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공직자의 전형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났으니 세상이 조금은 나아졌나 생각했는데, 선관위 사태를 보면 그런 공무원들이 여전히 곳곳에 있지 않은가 싶어 절망스럽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