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반도체발 돈벼락을 맞고 있다.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5월까지 무역수지 흑자 누계액은 1021억달러에 달한다. 역대 연간 최고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2017년의 952억달러였는데, 불과 5개월 만에 역대 최고 기록을 넘어섰다. 외화 획득 능력을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규모도 올해 1분기 9.4%로 사상 최고치로 집계됐다.
한국 증시 역사상 두 번째 돈벼락이다. 첫 번째 돈벼락은 19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 시대에 나타났다. 당시 3저는 철저히 국제 환경의 변화에 기인했다. 저금리와 저유가, 저원화가치는 모두 외생적인 환경 변화의 산물이었다. 1981년 20%에 달했던 미국의 연방기금금리는 1986년 5.8%까지 하락했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서 외채 부담에 시달리던 한국 경제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두바이유 가격도 1981년 배럴당 35달러 수준에서 1986년 8달러대로 급락했다. 여기에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강세가 겹치면서 100엔당 원화 환율은 1985년 290원에서 1988년 590원까지 상승했다.
대외 환경의 개선으로 한국의 GDP 성장률은 1986~1988년 3년 연속 10%를 웃돌았고, 경상수지는 사상 처음 흑자 기조에 진입했다. 수출 호조로 유입된 달러는 시중 통화량을 크게 늘렸다. 1987~1988년 총통화(M2) 증가율은 30%를 웃돌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8%를 넘어섰다. 풍부한 유동성은 자산시장으로 흘러갔다. 코스피는 4년 만에 666% 상승했고, 전국 땅값은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서울과 수도권의 집값과 전셋값도 급등했다.
선택적 호황, 비용은 사회가 부담
그러나 당시에는 호황의 과실이 비교적 넓게 확산됐다. 민주화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강화되면서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제조업 전반으로 고용과 소득이 확대됐다. 오늘날 중산층 형성의 토대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정부도 급등하는 집값에 대응해 200만호 주택 건설 계획을 추진하며 공급 확대에 나섰다. 부작용은 있었지만, 호황의 열매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기 위한 정책적 대응도 함께 이뤄졌다.
현재 반도체 호황은 양상이 다르다. 총량적 거시지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좋지만, 호황의 수혜는 일부에 집중되고 있다. 반도체 기업과 소속 노동자, 그리고 반도체 기업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들이 가장 큰 혜택을 누린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의 수혜를 보는 전력기기나 일부 장비 업체까지 범위를 넓힐 수는 있지만, 전체 산업으로 보면 혜택 범위는 생각보다 좁다. 반면 제조업의 상당수 업종은 여전히 수요 부진과 중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서비스업이나 자영업 역시 반도체 호황을 체감하기 어렵다.
문제는 호황의 비용은 사회 전체가 부담한다는 점이다. 호황은 필연적으로 물가를 자극한다. 소득이 함께 증가하는 사람에게 물가 상승은 감내 가능한 부담일 수 있지만, 임금이 제자리인 근로자와 연금생활자, 자영업자에게 인플레이션은 실질소득 감소를 의미한다. 금리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빅테크들은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위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회사채와 주식을 발행하며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글로벌 자금 수요가 폭증하면 자본의 가격인 금리는 상승 압력을 받는다. 이미 세계적으로 시장금리가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와 가계, 기업 모두 역사상 가장 많은 부채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 상승은 호황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제주체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2025년 기준 국내 상장 제조업체의 43%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다. 반도체 호황이 모든 기업의 호황은 아니라는 뜻이다.
AI의 확산도 새로운 변수다. 지금까지의 기술혁신은 일자리를 늘리는 방향으로 작동했지만, AI는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일부 직무를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산업은 성장하는데 노동시장 전체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번 호황은 과거보다 훨씬 선택적인 호황이다.
주택시장의 불균형은 상황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1980년대 말 3저 호황의 유동성 과잉으로 집값이 폭등했을 때, 정부는 ‘200만호 주택 건설 계획’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당시에는 분당, 일산 등 주택을 대규모로 지어 올릴 수 있는 물리적·지리적 공간이 존재했다. 대규모 신도시 공급 예고는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며 주택시장 심리를 안정시키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과실’을 넓게 확산시킬 정책 필요
지금은 어떤가. 수도권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대규모 택지를 개발할 물리적 공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도심 재건축과 재개발은 복잡한 이해관계, 최근 몇년간 폭등한 공사비로 진척이 더디기만 하다. 돈벼락을 맞은 소수의 자금이 서울 핵심지와 반도체 클러스터 배후 지역으로만 집중되는데, 이를 흡수할 물리적 주택 공급 여력은 과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이번 호황이 유발하는 자산 가격의 상승은 1980년대보다 훨씬 장기화되고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자산을 가진 소수는 가만히 앉아 더 부유해지고, 소외된 다수는 주거 사다리가 끊어진 채 아래로 밀려나는 격차의 심화다.
이런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정책 방향이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호황의 과실을 넓게 확산시키는 정책이다. 반도체 호황기에 자연스럽게 증가한 법인세와 소득세 등 늘어난 세수를 일반 재정에 섞어 쓰기보다, 미래 산업 전환을 위한 재원과 사회안전망 확충에 우선 배분하는 ‘호황기 재정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고금리와 고물가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취약계층과 한계기업을 위한 안전망도 고민해야 한다. 다만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상장 제조업체 등에 대해 기계적인 만기 연장으로 부실을 키우기보다, 선제적인 채무 조정과 사업 축소 및 전환 등을 지원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주택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는 앞 세대가 우리에게 넘겨준 선물인 그린벨트 활용까지 공론의 장에 올려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반도체 호황 이후의 과제는 그 돈벼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1980년대 3저 호황이 중산층을 만들었다면, 이번 호황은 자칫 자산가와 비자산가, 반도체 종사자와 비종사자, 고신용자와 저신용자의 격차를 더 확대할 수도 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