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하워드 베커는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라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붙인 이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낙인(labeling)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만드는 행위가 된다.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은 단순한 인구 통계학적 분류이다. 그 자체로는 정치집단이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와 정치권이 ‘이대남’ ‘이대녀’ 등으로 부르면서, 설명의 도구를 넘어 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이라는 함의를 내포하게 되었다.
범주화와 이름 짓기는 실재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보다 갈등을 생산하거나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존재하지도 않던 집단의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 집단 간 적대감은 실제로 이해관계 충돌이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헨리 타지펠이 지적하듯, ‘내집단 편향성’은 단지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만 있어도 발생할 수 있다.
낙인이 확산되면 개인을 하나의 사회적 유형으로 묶어버리는 환원론적 담론들이 증가한다. 이로 인해 현실세계마저 다양성이 감소하여 단순화될 수 있다. 인위적 차별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분류에 맞춰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대남’이라는 주장과 무관했던 온화한 성품의 학생도 언론이 계속 “이대남은 분노한다”라고 하면 그 정체성을 받아들여 집단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인했거나 불확실했던 현실을 사실이라 여기고 행동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자기 충족적 예언’ 현상이다.
단순화된 두 범주의 대립적 차이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부 의견이나 자극적인 사건이 ‘이대남의 생각’ ‘이대녀의 저항’ 등으로 보도된다. 이 과정에서 소수의 극단적 목소리가 전체 집단의 여론처럼 호도되며, 집단 간 오해와 갈등을 키우기도 한다.
이름 붙여진 20대는 정치적 동원의 도구가 되기 쉽다. 정치인들은 정치 동학적 이유로 개인들보다 집단을 상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다양성이 내재된 통계적 범주들보다 ‘이대남’ 또는 ‘이대녀’라는 정치집단이 훨씬 유용한 것이다. 정치가 기존 집단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고 재생산했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대남과 이대녀는 원래부터 강한 정치적 실체였기 때문에 주목받은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명명과 구분 자체가 집단 정체성과 대립을 강화했을 수 있다. 언론과 정치권은 이대남과 이대녀의 갈등을 논의한다고 하지만, 그 명명행위 자체가 갈등을 만드는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은 20대가 실제로 마주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다. 그들이 겪는 취업난, 주거 빈곤, 부채, 과도한 경쟁 환경 같은 구조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 ‘어느 당을 지지하는가’가 더 큰 뉴스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청년의 삶 자체보다 정치적 득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실제로 성별, 세대별 경험 차이나 정치적 태도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차이를 단순화하고 왜곡하여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청년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독립적인 인격체이자 다양한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한 존중의 시작은 그들을 절대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다.
한동섭 한양대 교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