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왼쪽)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한·미 무역협상의 ‘키맨’이었던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의 위세가 약화하고,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통상 정책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8일(현지시간) 러트닉 장관의 조력자 수준에 머물렀던 그리어 대표가 어떻게 그를 제치고 급부상하게 됐는지 집중 조명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초까지만 해도 그리어 대표는 러트닉 장관이 없는 자리에서는 회담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어 대표가 방미한 인도의 경제담당 고위 관리와 따로 만나자 러트닉 장관은 불쾌감을 표하면서 이들을 상무부 청사로 불러들여 자신이 배석한 상태에서 다시 회의하도록 했다.
이후 그리어 대표가 외국 고위 관리와 만날 때는 반드시 USTR 청사가 아닌 상무부 청사에서, 러트닉 장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담을 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고 WSJ는 전했다.
하지만 최근 열린 미·인도 무역 협상은 둘의 뒤바뀐 입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어 대표는 인도를 방문해 인도 무역부 장관과 회담을 하고 무역협정 체결의 세부사항을 조율했다. 원래대로라면 러트닉 장관이 진두지휘 해야 했을 회담이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지난해 한국, 유럽연합(EU), 일본과의 무역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 키맨이 러트닉 장관이었고, 그리어 대표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모양새였던 것과 크게 대비된다. 그리어 대표는 연방대법원의 상호관세 위법 판결 이후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와의 관세 협정 재정비를 주도하고 있는 데다, 미국·멕시코·캐나다무역협정(USMCA) 재협상도 이끌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온 러트닉 장관의 행보는 최근 상대적으로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러트닉 장관이 미성년자 성착취범인 고 제프리 엡스타인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데다,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가 관세 환급금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수익을 챙기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쿠시 데사이 백악관 부대변인은 “러트닉 장관과 그리어 대표는 각자의 관할권 아래에 있는 법적 권한에 따라 무역 논의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며 두 사람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는 러트닉 장관의 업무 스타일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온 것으로 보인다. 앞서 폴리티코는 “러트닉 장관이 협상을 밀어붙이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은 대부분 인정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좋아할 만한 ‘보여주기식’ 성과만 좇으면서 정작 협상 이행의 후속 조치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는다는 평판을 얻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현직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은 “이 때문에 미국과 무역 협상을 해야 하는 외국 정부 관계자들은 (깐깐하게 따지는) 그리어 대표보다는 러트닉 장관을 상대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란 조언을 얻고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