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일 유럽연합(EU) 정상들과 북한·러시아 군사협력 규탄, 북한 핵 불인정, 북한 인권 개선 촉구 등을 담은 공동성명을 채택한 것은 이 대통령의 그간 행보에 비춰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중국·러시아와 각을 세우고, 북한을 내란에 동원하려던 윤석열 정부의 외교 문법과 별 차이가 없다. 제대로 ‘긁힌’ 북한이 “한국의 집권자가 거추장스럽게 쓰고 있던 ‘평화’의 가면을 내던졌다”며 반발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지난 1년간 걸어온 행로에서 ‘마이클 잭슨 문워크하듯’ 갑자기 뒷걸음친 이 사태가 어떤 경위로 발생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미 한국 정부가 밝힌 입장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며 “러시아나 북한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부담이 되리라고 보지 않는다”고 했지만 과연 그렇게 넘길 일인가.
아마도 외교 관료들은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 EU의 입장을 대체로 수용했던 것 같다. EU와의 협력을 위한 방문이고, 열거된 내용들이 한국의 외교 원칙에 위배된다고 보기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문서와 언어가 외교에서 갖는 중차대함을 감안하면, ‘한반도 평화공존’을 중시해온 이재명 정부가 정상외교 공동문서에서 북한에 가장 민감한 이슈들을 ‘대결적’ 언어로 제시한 것이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문서로 인해 지난 1년간 이재명 정부가 힘써온 대북 신뢰 회복 노력에 흠집이 난 것은 사실이다.
북미 대화 ‘한국에 플러스’ 보장 없어
대전환기 ‘냉랭한 평화’가 나을 수도
지난 1년 회복기, 이젠 ‘재건축’ 필요
미국 변하는데 우리만 그대로여서야
이 대통령이 지난 19일 기자들에게 유럽 순방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를 소개하며 ‘미국 피스메이커, 한국 페이스메이커’론을 다시 언급했다. 대통령은 “비자주적, 비주체적 표현일 수 있다”면서도 “한반도 문제 완화, 평화공존의 길을 여는 데 대한민국 스스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 롤러코스터’ 트럼프에 한반도의 운명을 또 한번 걸어보겠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를 만나줄지 불투명한 데다 만남 자체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은 2018~2019년 확인한 바 있다. 동맹을 수탈 대상으로 여기는 트럼프, 한국과 ‘적대적 절연’ 중인 김정은이 만나 한국에 플러스가 될 합의를 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만약, 북·미 대화가 성사되더라도 그 결과가 한국의 대미 종속성을 강화하거나 전략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부작용이 예상된다면 지지할 이유가 없다.
두 가지 에피소드는 ‘한반도 평화’ 의제가 이재명 정부의 외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듯한 인상을 준다. 한반도 평화는 비용 대비 실익이 불확실하고 한국이 국제질서의 대전환에 대응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목표처럼 돼버렸다. 대통령도 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남북간에는 ‘냉랭한 평화(cold peace)’ 상태가 지속되는 편이 서로에게 유리할지 모른다. 그 밖에 할 일들도 많다.
이재명 외교의 지난 1년은 급한 불을 끄고 외교적 리듬을 되살리는 회복기였다.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복원했고, 윤석열 정권 때 최악이던 남북관계도 ‘냉온정지’ 상태로 안정화했다. 인도, 브라질 등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 강화, 반인도적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규탄 등 기존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 외교가 국제질서의 대전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면 ‘재건축’ 더 나아가 ‘재개발’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다. 국제질서가 힘의 정치로 회귀하고, 경제안보가 절대화하는 변화 속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외교전략을 재설계하고 그에 기반해 움직여야 한다. 이란 전쟁에서 확인한 대로 미군기지가 ‘안보리스크’가 된 상황, 동맹의 유지비용이 효용을 초과하고 있는 상황을 검토해 한·미관계를 재조정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조차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판에 ‘미국 심기’를 걱정해 행동 반경을 스스로 구속하는 비주체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G7보다 커진 시장 이자 에너지 네트워크인 브릭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 가입도 주저할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시기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시아인프라은행(AIIB)에 가입했던 것처럼 국익 중심으로 움직이면 된다.
서의동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