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숏폼 새로운 마케팅 수단으로
영화보다 뜬 ‘오정세 밈’, 흥행 성적은 ‘저조’
1020 관객엔 쇼츠 홍보로 승부수
결국 중요한 건 ‘영화의 힘’
긴 영상을 더 이상 집중해서 보지 않는 세태에 맞춰 영상이나 음악의 길이는 짧아지고, 대중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내용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기획 단계부터 숏폼 바이럴(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지는 현상)을 염두에 두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콘텐츠는 더 웃기고, 더 짧아지고, 더 빨라졌다. 드라마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영화, 가요계가 숏폼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을 살펴봤다.
영화 <와일드 씽>의 ‘최성곤’(오정세)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니가 좋아~” 지난 두어 달 ‘쇼츠’(짧은 영상)를 내리다가 단발머리의 오정세를 마주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흰 실크 블라우스에 그윽한 표정. 세기말 발라드 가수를 연상케 하는 오정세가 노래를 이어간다. “니가 예뻐서~ 좋아”
숏폼의 시대, 영화 <와일드 씽>(손재곤 감독)은 개봉하기도 전에 밈이 됐다. ‘니가 좋아’는 <와일드 씽>의 발라드 가수 ‘최성곤’(오정세)의 왕년 히트곡이다. 개봉 두 달 전쯤 공개한 극중 혼성그룹 ‘트라이앵글’(강동원, 박지현, 엄태구)의 청량한 Y2K 댄스곡 뮤직비디오가 영화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면, ‘니가 좋아’는 립싱크 패러디 영상이 유행하며 상반기 최대 밈이 됐다. 파생 콘텐츠가 영화보다 먼저 인기를 끄는 것은 전에 없던 현상이다.
영화 마케팅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타짜>(“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나 <신세계>(“살려는 드릴게”)처럼 영화를 보고 또 본 이들이 많은 나머지, 특정 장면이나 대사가 자연스레 성대모사·패러디되며 밈이 생겨난 것과 대조적이다.
<와일드 씽> ‘니가 좋아’ 뮤직비디오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밈과 바이럴 마케팅
숏폼 콘텐츠는 영화 자체보다는 그 마케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쇼츠·릴스’ 영상으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방법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다만 <와일드 씽>의 홍보 마케팅이 성공 사례인가 묻는다면,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니가 좋아’ 뮤직비디오가 29일 기준 302만회 이상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밈’으로는 성공했지만, 영화 누적 관객수는 123만 명으로 손익분기점인 200만 명을 넘지 못하고 있다. 화제성이 극장으로 발길을 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보고픈 마음’까지 자극하는 바이럴(입소문) 마케팅이 영화계에서 점점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홍보·마케팅사에서 출발한 투자·배급사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이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배급사 바이포엠스튜디오가 인스타그램 공식계정에 올린 <노이즈> 관련 영상. 인스타그램 갈무리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영화마다 표적 연령층을 분석하고, 그들의 SNS 알고리즘에 뜰 법한 홍보 쇼츠를 만든다. 그리고 홍보비의 50% 이상을 영상이 온라인에 잘 유통되게 하는 데 쓴다. 지난해 10대 관객들의 인기를 끈 공포 영화 <노이즈>(170만 명)는 ‘강심장만 도전하세요’라는 등 학생들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영상을 노출하는 식이었다. 지난해에는 <소방관>(2024년 12월 개봉), <승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등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일각에서는 영화의 만듦새가 아닌, 바이럴 마케팅 여부에 흥행이 좌우되는 것이 산업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한상일 바이포엠스튜디오 이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1020세대가 가장 많이 보는 쇼츠와 릴스는 중요한 승부처일 수밖에 없다”며 “최근에는 전통적인 투자·배급사들도 이전보다 공격적으로 온라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영화 <백룸>의 ‘클락’(추이텔 에지오포)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구점 지하에서 발견한 미지의 공간 안을 헤매고 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영화를 발굴할 때도 ‘입소문이 날 만한 영화인가’를 신경 써서 본다고 한다. 공포 외화 <백룸>을 적극적으로 수입해 온 것도 온라인 밈에서 파생된 영화를 젊은 관객에게 “잘 소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럴 마케팅은 부차적일 뿐, 결국 ‘영화 자체의 힘’이 있어야 흥행할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왕과 사는 남자>와 <범죄도시> 시리즈 등 유수의 흥행 영화를 제작한 장원석 비에이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코미디나 액션 등 일부 장르에 대해선 줄거리 전개가 더 짧고 빠른 호흡으로 진행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숏폼 대중화가 근본적인 영화 소비(및 제작) 방식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쇼박스 제공
올해 <왕과 사는 남자>, <살목지>, <군체> 등이 흥행한 투자·배급사 쇼박스의 조수빈 홍보팀장도 “미디어 접점이 높은 젊은 층은 바이럴 마케팅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확장성 있는 흥행은 그 이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은 개봉 주 주말부터 (작품 배경인) 강원 영월에 관광객이 늘었다는 소식에서부터 체감했다. 실제 관람객들의 움직임과 입소문은 인위적인 바이럴을 따라가기 어렵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영화가 기획되고 투자받을 때, ‘마케팅할 요소가 있는가’ 여부는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 대형 투자·배급사의 기획·투자 담당자는 “이전보다 홍보 전문가의 의견을 기획 단계부터 주의 깊게 듣는다”며 “1분 내외의 짧은 영상 콘텐츠가 중요한 홍보 수단이기 때문에 ‘홍보 요소로 내세울 만한 확실한 콘셉트가 있나’를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부터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