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종종 묘한 얘기를 했다. “학예에서 놀다”는 말도 그중 하나다. 여기서 학예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공자 당시 위정자의 교양 필수인 예법, 음악, 활쏘기, 수레 몰기, 읽고 쓰기, 산술의 여섯 가지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유가의 여섯 가지 경전, 곧 유가 최고의 지식을 가리킨다.
어느 쪽이든 다 유가에서 내세우는 핵심적인 공부 대상이다. 그런데 공자는 이렇듯 중요한 공부 대상에서 놀아야 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공부거리를 놀잇거리로 삼아 놀라고 한다. 보통 우리는 “공부는 그만하고 놀아라” 식으로 말한다. ‘놀다’를 ‘공부하다’의 반대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예와 더불어 논다는 공자의 말은 참으로 묘하다. 공부거리를 놀잇거리로 삼아 논다고 함은 결국 공부를 한다는 얘기인데, 놀았는데 공부하게 된다는 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가 싶어서이다.
그런데 노는 것, 곧 놂을 공부와 연계한 것은 공자만이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공자의 대척점에 서 있던 장자도 논다는 활동을 공부한다는 활동과 동일시했다. 그러니까 놂을 어엿한 공부법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여러 공부법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공부법으로 제시했다. 소요하면서 놂이라는 뜻의 ‘소요유(逍遙遊)’가 바로 그것이다.
소요유는 장자의 사유가 담겨 있는 <장자>라는 책의 첫 편 제목이다. 장자가 자신의 사상 가운데 제일 먼저 제시하고 싶은 바가 바로 소요유였다는 뜻이다. 그만큼 소요하면서 놂을 중시했다는 것인데, 이는 소요한다고 함이 장자가 말한 진리를 실천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놂은 그러한 실천을 가능케 해주는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놂은 장자에게서도 진리를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공부법이었다.
도대체 놂에 어떤 공능이 있기에 서로 반대되는 사상을 표방한 공자와 장자 공히 놂을 핵심적인 공부법으로 제시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놂이 공부가 되고 공부가 놂이 되는 묘한 공능 때문이다. 물론 이는 묘한 만큼 실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다만 공부를 일로 바꾸면 얘기가 살짝 달라진다. ‘덕업일치’란 말이 있지 않은가? 놂이 일이 되고 일이 놂이 되는 삶은 그리 멀리 있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