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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개

입력 2026.07.01 20:01

수정 2026.07.0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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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살던 집엔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동네를 어슬렁대던 흰 개 한 마리가 그 마당에 들어와 살았다. 개는 할머니가 챙겨준 밥을 먹고 대문 앞 앵두나무 밑에서 잎을 따며 놀기도 하고,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멋대로 일과를 보내던 개는 1년 후 마당 안쪽에 세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그 개를 집에 들인 적이 없으므로, 그들을 맡아 기른다는 생각 또한 하지 않았다. 꼬물대던 강아지들이 마당 곳곳을 돌아다니며 장난을 칠 때쯤 엄마와 아빠는 어미 개와 새끼들을 교외에 살고 있던 큰고모 집으로 보냈다. 내내 서먹하기만 하던 객식구들이 떠나던 날, 나는 그 개가 머물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멋대로 나타나 멋대로 머물다 멋대로 사라진 그 야속한 개의 이름은 예삐였다.

그 무렵 어울리던 친구네 집에도 흰 개가 있었다. 골목길 어귀에서 할머니에게 맞고 있는 걸 보고 친구의 언니가 훔치듯 데려왔다는 그 개는, 안락해 보이는 하늘색 침대에서 실컷 물어뜯어 너덜너덜해진 장난감과 함께 잠을 잤다. 언니는 내 친구와 나에게 종종 그 개의 산책을 맡겼다. 마당에 멋대로 머물던 개밖에 몰랐던 나는 매일 옷을 갖춰 입고 바깥을 산책하는 그 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개는 넓고 잘 닦인 길을 두고 허름한 재래시장 골목길을 좋아했다. 그 시장은 개발이 시작되며 상인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빈 점포와 빛바랜 차양, 부서진 좌판이 가득한 곳이었다. 을씨년스러운 길이었지만 그 개는 사람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탐정처럼 킁킁대며 제 세상처럼 경쾌하게 골목을 누볐다.

장윤미 감독의 영화 <관리처분계획 - 미아리 텍사스 편>은 서울의 마지막 성매매 집결지로 불리는 ‘미아리 텍사스’가 헐리는 과정을 집결지 내부에서 연대하며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총 3부로 나뉘는 작품에서 1부인 ‘골목’에서는 철거가 진행된 미아리 텍사스 구석구석을 포착한 사진과 함께 그곳에서 스무 해쯤 머문 한 여자가 단골 식당 이모에게 부치는 편지가 내레이션으로 흐른다. 감독 본인이 직접 쓰고 녹음했다는 편지는 특정 개인의 사연이 아니라 그곳을 거쳐 간 많은 이들의 삶을 하나로 포개놓은 것처럼 들리는데, 그 편지 속에서 여자들은 그곳에 머물던 개와 고양이의 안부를 묻고 추억을 만들던 공동의 공간을 추억하며 그 시간 속에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 했던 말들을 되새긴다.

편지 속 여자의 목소리는 주인이 빠져나간 가게들의 사진을 따라 걸으며, 어느 가게가 인테리어를 새로 하면 이웃한 가게도 하나둘 따라 모양을 고치던 유행이 너무 싫었다고 말한 뒤 자신은 계속 똑같은 반찬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며 짐짓 고집을 부린다. 허름하고 낡고 부서졌을지라도 자신이 적응한 모양 그대로를 지키고 싶은 애처로운 마음이다. 세상에서 겉돌다 어렵게 터를 잡은 이가 드러낸 그 서글픈 고집은 그들이 철거에 본격적으로 맞서는 2부 ‘투쟁’으로 이어진다. 거친 욕설들로 이루어진 이들의 투쟁 언어는 모두를 설득할 만큼 정연하지 않지만, 결코 연민에 호소하지 않는 일관된 자기 증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일을 했고 그 대가는 고용주, 건물주와 함께 나눠 가졌으며, 세상으로부터 무수히 비난받았을지언정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의 ‘삶’을 지켜왔다는 것. 그러니 어떤 형태의 삶이든 이렇게 쉽게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 영화는 이들의 투쟁을 개인의 미시사로 다시 접근하는 3부 ‘이모’와 연결해 모욕을 긍지로 삼는 삶에 대해 말하며, 모두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일에도 한 사람의 인생이 얽혀 있음을 설득해 보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편지 속에서 잠시 스쳐 간 ‘흰 개를 들이면 복이 온다더라’ 문장에 사로잡혀 있다. 불안을 드러내던 화자에게 이모가 말해준 미신 같은 위로를 듣고 나는 흰 개가 떠난 우리 집 마당의 빈자리, 친구의 흰 개가 걷던 버려진 시장의 골목을 떠올리며 운다. 폭력과 착취, 비난과 모욕 속에서도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흰 개를 곁에 두었던, 그러다 결국 그 흰 개의 복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이들의 삶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후미진 골목을 흰 개와 함께 걷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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