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다가 아래 기사를 읽었다. 그대로 인용한다. “‘판사님이 고민하신 결과가 이겁니까? 변호사가 고의로 소송을 말아먹었는데,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런 결론 내리는 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이 나라 법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 방청석 맨 앞줄에서 선고공판을 지켜보던 이기철씨가 ‘학교폭력 소송은 2022년 모두 종료됐다’는 주문을 낭독한 판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판부는 굳은 얼굴로 항의하는 이씨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경향신문 6월25일 보도)
누구에겐들 아니 그러랴만 나의 외할머니는 몹시 당찬 분이셨다.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학창 시절 방학이면, 시골 외가에서 뒹굴며 놀았다. 누에치기가 큰 부수입이었는데, 누에고치를 농협에 납품하는 건 내 몫이었다. 덕유산 골짜기 사과도 명물이지만 그 뽕잎 먹고 여문 고치는 때깔도 좋았다. 손끝 매운 할머니의 작품은 늘 최고등급을 받았다. 평생의 한도 많았던 할머니. 장에 다녀오시거나 구장을 상대한 날엔 무슨 못마땅한 일이라도 있으셨나. 곰방대에 봉초를 꾹꾹 눌러 담아 유엔표 팔각성냥을 한 발로 괴고 착, 그어 담배 연기 한 모금 맛있게 잡수시며 게으르게 올라가는 연기를 보면서 혼잣말을 하셨다. “으이구, 돼지새끼 같으면 내다 팔고 다시 샀으면 좋겠네ㅅ”
무슨 말을 덧붙이랴. 조금 더 검색하면 고스란히 드러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민낯. 부처 눈에는 부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했던가. 영화 <넘버3>에서 깡패 같은 검사 최민식의 명대사. “사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 죄를 짓는 놈이 나쁜 놈이지.” 이쯤 되면 법을 굴린다는 자들이 문제의 소굴이 아닌가. 지키는 자 뒤는 누가 지킨다더냐.
판사? 변호사? 법? 그 앞에서 학교폭력으로 아이를 잃은 당사자는 눈물로 외친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는 김수영의 시다. 찬물에 밥 말아 먹다 말고 고작 할머니의 저 말씀이나 떠올리는 건 너무 작은 탄식이 아닌가. ‘축협’도 추가한다, 돼지새끼라면 내다 팔고 다시 사고 싶은 목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