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는 법은 간단하다. 들어오는 돈보다 더 많이 써버리면 재산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쓰는 돈을 섬세하게 관리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재정을 유지하는 기본이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은 많은 나라가 부러워하는 제도이다. 일정 부분 의사들의 희생에 기반한 제도라 비판과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고 있다. 당연히 앞으로도 쭉 지속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한다. 그중에 기본은 위에서 이야기한 ‘지출관리’다.
한정된 재원으로 전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만큼 건강보험 지출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질환을 보장할 것인가, 어떤 치료에 재정을 투입할 것인가는 결국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얼마나 직접 관련되는지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유전성 탈모 치료제의 건강보험 급여화 논의를 보고 있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탈모치료제 급여화 추진에 논란
건보재정 한정, 건전성 훼손 우려
중증·희소질환 환자 지금도 고통
‘물밑’에서는 더욱 냉철한 판단을
탈모로 인한 고통을 부인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목적은 모든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재원 안에서 국민 건강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데 있다. 탈모 급여화 논의가 여기에 걸맞은 일인지는 곰곰이 따져봐야 할 일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선민 의원실(조국혁신당)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의사 처방이 필요한 탈모 치료제 공급액은 2022년 2164억원에서 2025년 2568억원으로 지속해서 증가했다. 여기에 진료비를 합치면 지난해에만 연간 2900억원가량을 쓴 셈이다.
정부가 계획대로 건강보험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관련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전문의약품 공급액을 기준으로, 환자가 전체 약값에서 내야 하는 비율(본인 부담률)을 30%로 할 경우 건강보험이 연간 약 1797억원, 본인 부담률을 50%로 높여 잡아도 약 1284억원을 써야 한다. 실제 급여화가 실행되면 수요가 늘어날 것이기에 건강보험 부담액은 이보다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건강보험 재정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저출생과 고령화로 의료비 지출이 계속 늘어나면서,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크다. 건강보험이 지속하려면 새로운 급여 항목을 도입할 때마다 그 필요성과 우선순위를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지금도 상당수 중증·희소질환 환자들은 고가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을 기다리고 있다. 치료를 받지 못하면 생명이 위협받거나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재정 부족과 비용 대비 효과 문제로 급여 적용이 미뤄지는 사례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탈모 역시 질병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을 같은 순위에 둘 수는 없다. 의료 재정을 유지하려면 냉정한 선택을 해야 한다. 생명 유지와 직결되는 치료와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치료가 충돌할 경우 어느 쪽을 먼저 지원할 것인지는 굳이 토론이 필요 없어 보인다.
정부가 우선 지원 대상을 청년층으로 검토한다는 점도 개운치 한다. 유전성 탈모는 특정 연령대에만 발생하는 질환이 아니다. 그런데도 특정 연령층만을 대상으로 지원을 추진하는 것은 건강보험의 보편성 원칙과 충돌할 소지가 있다. 정책 목적이 건강권 보장인지, 아니면 정치적 메시지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복지는 무한할 수 없다. 건강보험이 우선순위에 둬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생명과 건강이다. 그나마 정부가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4일 열려 했던 ‘모두의 토론회’를 일단 취소한 것은 다행이다. 애초 정부는 국민이 직접 정책 논의에 참여하는 모두의 토론회 첫 번째 주제로 ‘탈모 치료제의 건보 급여 적용’을 선정하고, 국민참여단 200명이 논의하는 방식으로 공론화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공론화 일정이 연기되면서 탈모 치료 건보 적용 논의는 당분간 ‘물밑’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 등 관련 부처는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물밑에서 더욱 냉철한 결론을 내기 바란다.
홍진수 사회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