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머리가 된 내게 아버지는 말했다. “의지만 있으면 다 살아.” 하지만 중병을 앓아본 사람들은 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높은 정신의 힘으로 몸을 다스릴 수 있다는 오랜 신화는, 일상이 일상으로 영위되지 않는 순간 산산이 깨진다. 부서진 자리에서 자라나는 마음이 꼭 의지만은 아니라서, 질병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도 여러 갈래로 다양하다.
그러나 환우회나 기관이 공모하는 이야기의 문법은 여전하다. 평안한 일상의 주인공이 갑자기 큰 병에 걸린다. 낯선 고통에 몸부림치고, 더러는 나아질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거나 임사 체험을 한다. 그러다 주변 사람들의 사랑 또는 어떤 계기가 마음을 다잡게 한다. 건강해질 거라는 희망과 정신력으로 다시 버틴다. 결국 생환한다. 앓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일 리 없건만, 아서 프랭크가 ‘회복 서사’라 이름 붙인 이 이야기틀은 건재하다.
그 서사가 아픈 사람을 살리는 데 쓸모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 즉 치료 의지를 갖는 것이 아픈 사람의 역할이다. 독립적인 개인의 결심처럼 보이기도 하는 의지는 그러나, ‘회복 서사’에 포함되어 있지만 조명받지 못하는 요소로 구성된다. 앞서 언급한 ‘주변 사람들의 사랑 또는 어떤 계기’가 이러한 요소 중 하나다.
조혈모세포 이식 중 일어날 상황이나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설명 들은 것은 내가 아니라 보호자들이었다. 전해 들은 이야기는 직접 설명 들었던 부작용보다 더 많은 위험, 심지어 사망까지 암시하고 있었다. 환자도 그 내용을 검색해 미리 알기도 하니, 병원의 노력이 크게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환자가 공포에 압도되어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의료진과 보호자가 합심한다는 사실 자체다. 질병을 극복하려는 일관되고 강한 집념이란, 위기에 몰리면 자동 생성되는 마음이 아니다.
나아지려는 의지가 ‘없어 보이는’ 환자들도 있다. 건강 콘텐츠에 등장하는 모범 환자들과 달리 보호자나 의료진 입장에서는 말 안 들어 골치 아픈 부류다. 그들은 퇴원하면 곧 사망할 게 분명한데도 자녀들에게 전화를 해 꺼내달라고 애걸하다 윽박지르는 환자다. 평생의 낙이 반주 한잔이라며 의사에게 음주를 흥정하는 ‘철없는’ 환자고, 담배를 끊지 않아 속을 뒤집어놓는 ‘정신 빠진’ 환자다. 검증된 표준치료를 거부하고 황토를 맨발로 밟으며 유사과학을 전전하는 ‘한심한’ 환자이기도 하다.
의지를 완치를 향한 ‘정상적인’ 집념으로만 상상한다면, 병과 함께 산다느니 병을 다스린다느니 하는 말들은 어떻게 윤색한들 몸을 정신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신화의 변주일 뿐이다. 그러나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오는 의지는 그보다 훨씬 다양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의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의지다. 절망과 희망을 오가는 생존의 의지가 아니라, 짧아진 시간을 제 삶으로 제 ‘쪼’로 살아내려는 의지다. 그것은 한 장짜리 진단서보다 훨씬 두터운, 오래 앓아온 몸으로 해석한 결과다. 지난한 삶을 근거로 한 합리성이다.
언젠가 한 독자는 암에 걸리고도 담배를 끊지 않았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왜 저렇게 스스로를 버리나, 어찌 저리 무책임하나.’ 그러나 이제는 그 담배가, 아버지가 자신의 삶을 위로하며 살려는 방식이었겠다고 했다. 이 생각이 고인이 된 아버지와의 관계를 되돌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보호자의 분투에 부응하지 않는 환자에 대한 원망도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전화통으로 전해지는 악다구니도, 투명하게 맺히는 한 잔도,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도, 실은 제 삶을 살아보려는 의지인 셈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조차 자신의 의지를 택한 것임을, 우리는 대체로 알아보지 못한다.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저자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