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움에 시달린 간호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괴롭힘에 시달린 그녀는 작년 4월 퇴사했다. 그러고 나서 노동청에 진정했는데, 노동청은 그녀가 가해자로 지목한 세 명 중 한 명에 대해서만 괴롭힘을 인정했다. 병원은 그 한 명을 훈계하는 것으로 사건을 끝냈다. 그 사실에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살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애초에 병원이 가해자들을 단속했더라면 그녀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원이 직장 내 괴롭힘을 조사하고, 인정하고, 조치했더라면 그녀는 계속 병원에 근무했을 것이다. 노동청이 전체 상황을 종합해서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했더라면 그녀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한 명만 가해자로 인정되었지만, 그 한 명에 대해 병원이 징계하는 ‘시늉’만 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가 겪은 과정은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이유는, 직장 내 괴롭힘이 피해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고, 동료들에게도 ‘나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면 직장은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 된다. 그래서 우리 법은, 산업안전의 책임이 있는 사용자에게 직장 내 괴롭힘을 예방하고, 조사하고, 조치하라고 정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딴판이다. 피해자가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면, 사용자는 마치 판사라도 된 양 증거를 따지며, 증거가 없으니 괴롭힘이 아니라고 종결한다. 책임을 권한으로 착각한 것이다.
법률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한 변호사가 쓴 직장 내 괴롭힘 조사 보고서를 봤다. 거기에는 “행위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괴롭힐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판사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에서 말하는 괴롭힘은 행위의 지속성과 반복성을 그 본질적 요소로 삼는다”며 ‘미친년, 지랄, 씨발’이라고 욕설한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고용노동부는 이 결정을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매뉴얼에 실었다. 이 매뉴얼을 본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 정도는 해도 되는구나.’ 도대체 얼마나 괴롭혀야 괴롭힘이라는 것일까.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이 아니라는 말보다 더 나쁘다. 법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껍데기만 취하고 취지는 일도 모른다.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창피해야 할 사람들은 또 있다. 언젠가부터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매뉴얼들에 ‘을질’ ‘허위신고’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주로 조직의 ‘을’인데, 이들이 하는 신고를 ‘을질’이고 ‘허위신고’라는 것이다. 이러면 그 누구도 괴롭힘 신고를 할 수가 없다. 괴롭힘 신고를 하지 않으면, 괴롭힘은 방치되고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직장 내 괴롭힘은 스펙트럼이 넓다. 사과로 끝낼 수준의 경미한 괴롭힘부터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괴롭힘까지. 중요한 것은 그 모두가 괴롭힘이라는 것이다. 괴롭힘으로 인정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대신 정도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든, 다른 직원들에게든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모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다.
윤지영 직장갑질119 대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