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박물관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에 전하노니’
72년 전 화마 속 기적적 생존한
영조·철종 어진도 피란지 부산으로 귀환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 전시에서 ‘성종실록’을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은 국가 운영의 거의 모든 과정을 문자로 남긴 ‘기록의 나라’였다. 그 정점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의 역사를 적은 1893권의 방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이다. 사관은 매일 국왕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사초로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실록은 영구 보관을 위해 설치한 사고에 각각 한 부씩 뒀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탔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다시 인쇄돼 정족산·오대산·적상산·태백산 사고에 분산해 보관됐다. 오늘날로 치면 여러 곳에 ‘백업’한 셈이다.
전란 이후 흩어져 보관돼 온 4대 사고본 실록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국가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부산박물관이 오는 7일부터 8월30일까지 부산박물관에서 여는 특별전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에서다.
이달 부산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맞춰 열리는 이번 전시에선 한국의 대표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등 조선의 기록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을 종합적으로 선보인다. 보기 드문 왕실 유물을 대거 만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록과 의례, 상징을 통해 작동한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 전시 전경. 국가유산청 제공
실록 편찬은 말 그대로 국가 사업이었다. 국왕이 승하(사망)하면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초와 각종 자료를 모아 초초·중초·정초를 거쳐 완성본을 만들었다.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나누어 봉안했으며, 기밀 누출을 막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은 물에 씻어 없애는 세초(洗草)를 거쳤다.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성종실록 4대 사고본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도록 한 부분이다. ‘경국대전’ 반포,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문제, 성종의 병세와 죽음에 대한 사관의 평가 등 조선 전기의 주요 장면들이 담겼다.
네 책의 사연도 제각각이다. 정족산사고본은 조선 전기 실록의 면모를, 오대산사고본과 적상산사고본은 각각 일제강점기 반출과 6·25전쟁을 거친 실록의 수난을 보여준다. 국가기록원 소장 태백산사고본은 외부 반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것인데 이번 전시를 위해 한 달만 공개하기로 했다. 이들 사고본은 조선이 국가의 기억을 어떻게 ‘만세에 전하려’ 했는지 보여준다.
같은 사건도 기록물마다 초점이 다르다. 정조 즉위를 두고 정조실록은 왕통 계승의 공식 역사로, 승정원일기는 즉위 당일 날씨와 신하들과의 문답까지 현장 기록으로 남겼다. 국왕의 일기 형식으로 편찬된 일성록에는 영조를 잃은 정조의 애통함과 군주로서의 다짐이 담겼다. 왕의 감정까지 적은 기록이 국가의 시간을 남겼다면, 왕실의 권위는 의례와 상징으로 형상화됐다.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 전시에서 선보이는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의 모습. 어진 뒤편으로 ‘일월오봉도’가 보인다. 배문규 기자
보물 ‘영조어진’(왼쪽)과 보물 ‘철종어진’. 국가유산청 제공
그 정점에는 국왕의 초상인 어진이 있다. 어진은 살아 있는 국왕과 같은 위상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이동할 때도 의장을 갖췄고, 일월오봉도와 함께 모셨다. 조선 왕조는 수많은 어진을 남겼음에도 현재 전하는 것은 극소수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동광동 국립국악원 창고에 보관되던 왕실 유물이 1954년 용두산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3400여 점의 문화유산이 잿더미가 됐고, 어진 48점 가운데 45점이 불에 탔다. 당시 살아남은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이 72년 만에 다시 부산에 왔다.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한 붉은 곤룡포 차림의 영조 어진과 군복을 입은 철종 어진에서 왕실 초상화의 정교한 묘사를 실견할 수 있다. 화면 3분의 1가량이 불탄 철종 어진은 전쟁과 화재의 상흔도 함께 전한다.
전시에 나온 유물들은 작은 도판으로 볼 때는 체감하기 어려운 크기와 물성, 정교한 만듦새를 느끼게 한다. 한 나라의 권위와 미감이 응축된 왕실 유물다운 ‘격’을 보여준다.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어보와 어책, 국가 기밀급 궁궐 그림인 ‘동궐도’, 당대 최고 기술이 집약된 왕실 도자기와 복식·생활용품도 함께 나온다. 조선 왕조 대일 외교의 중심지였던 동래부 관련 유물과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부산에서 열리는 전시의 의미를 더한다.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에 출품된 ‘영친왕비가 입었던 붉은 원삼’.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에 출품된 옥보와 옥보를 담는 함의 모습.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에 출품된 동궐도의 모습.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에 출품된 ‘화유옹주 무덤에서 출토된 생활용품’의 모습. 배문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