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부친이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주변 지인들이 과분할 정도로 위로와 지지의 마음을 보여준 덕에, 예정된 상실을 기다리는 시간이 견딜 만해진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마음의 힘을 실감한다.
그런데 만약 ‘암’이 아니라 ‘피해’였다면, 세상의 태도가 돌변했을 거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누구도 내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지 않지만, 피해자는 자주 듣는다. 그 말 이면에는 과거와 미래를 절연시키려는 특정한 시간관념이 있다. “산 사람”의 미래를 강조하는 건 아픔을 자신과 무관한 남의 일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거기에는 피해자만 잊고 침묵하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은근한 강요가 깃들어 있다. 그렇게 피해자는 고립된다. 올해 상반기에 전해진 이태원 상인과 세월호 참사 생존자의 비보가 이와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피해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피해자의 관점을 반영한 시간관념은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잊지 못한다’는 말에 담겨 있다. 피해자의 몸에 새겨진 과거는 피해자의 현재나 미래와 뒤섞인다. 가령 5·18 성폭력은 사건 발생 직후가 아니라 이제야 말해지기 시작한 ‘현재사’다. 인위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단절하는 시간관이 가해자의 망각을 정당화한다면, 반대로 피해자의 시간은 사실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체험을 대변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떠올라 슬픔이나 행복을 느끼는 일은 보편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세대에게 5·18이 먼 과거라고 말하는 세대론은 역사부정을 합리화하고자 가해자의 인위적 시간관을 청년세대에게 소급적용한다. 하지만 겪지 않았다고 역사가 남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배재고 야구부의 혐오표현은 광주일고 학생들에게 5·18을 ‘현재’로 겪게 만들었다. ‘집단’을 표적으로 삼는 혐오표현은 광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광주 청년들을 태어나기도 전 과거에 고착시킨다. ‘연좌제’란 이런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징계가 과하다며 ‘가해자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들은 정작 피해자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 이면에는 가해자를 향한 편향적 동일시가 있다.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 가깝게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 보호 이전에 피해자 보호부터 말하는 게 상식이다. 가해자의 미래만을 말한다면 피해자는 영원히 과거의 피해자로 남을 것이다.
‘가해자의 심성’을 공유한 자들은 피해자의 기억과 슬픔을, 과거와 기억을 모욕한다. 야당과 궤변론자들은 정치와 무관한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의 징계 결정마저 ‘5·18 성역화’라며 정쟁화한다. 가해와 피해를 뒤바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가해자 역시 반성 대신 자기 연민으로 기울어, 피해자를 탓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2차 피해다. 이런 가해자의 심성이 만연할수록 피해자 비난과 혐오도 커진다.
왜 가해자만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왜 피해자의 슬픔은 지지받지 못하는가? 왜 조롱거리가 되는가? 내 가족의 일에 대해 사람들이 보내준 마음처럼, 피해자에 대한 예의도 지켜지기를 바란다. 질병도 피해도 남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일부다. 그렇기에 피해자의 보호와 회복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이는 성인이 되어 언젠가 억울하고 부정의한 일을 겪을지 모를 학생들 모두의 미래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최성용 사회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