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모병제의 치명적인 함정은
모병과 징병을 가르는 기준이 경제적 형편이란 점이다
병역은 자유와 안전이란 공공재를
어떤 원칙에 따라 유지하는가를 드러내는 정치적 정의의 시험대다
이런 문제들을 간과하고 병역을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공동체의 안보는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선택적 모병제’를 하겠다고 한다.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은 해병대 연평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선택적 모병제란 “충분한 보수를 지급받는 직업군인을 선택하든지 혹은 그게 싫으면 단기 징병에 응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합한 이 새로운 제도는 언뜻 ‘선택’을 강조하여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국민에게 상당히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게 받고 짧게 복무하는 징병과 많이 받고 오래 복무하는 모병 사이의 선택은 병역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날 병역제도를 둘러싼 논쟁은 흔히 효율성이나 안보의 문제로 이해된다. 저출생으로 병력 자원이 감소하고, 첨단 무기체계가 발전하면서 전문 직업군인을 중심으로 한 모병제가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국가 생존의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징병제를 유지하거나 부활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역시 병역 자원의 감소와 청년층의 가치관 변화 속에서 선택적 모병제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선택적 모병제 제안은 아마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병역제도는 단순히 군사적 효율성이나 국가 재정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 만약 전면에는 인구절벽으로 인한 병역 자원의 감소를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개인의 진로와 자유를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욕구에 부합하려는 포퓰리즘적 의도가 숨어 있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어떤 시민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공동체를 방어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무를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병역제도의 기술적 선택 이전에 정치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다. 국가는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정조직이 아니라 공동의 운명을 공유하는 정치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부담 역시 함께 분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역은 공동체 유지비 공정 분담
인간이 국가를 형성한 이후 병역은 언제나 가장 무거운 시민적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세금은 재산을 잃게 하지만, 병역은 생명을 잃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병역은 단순한 행정적 의무가 아니라 인간이 공동체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가장 극단적인 희생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병역제도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정의의 문제가 되어 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병역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회피가 개인적 비겁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가 공동체 방어의 부담을 공정하게 분담하지 못할 때 병역 회피는 구조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부유한 계층은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병역을 회피하는 반면, 그 부담은 가난한 계층에 집중되는 경우가 반복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이 공동체를 방어하는 것이 민주정의 기본 원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유한 시민은 기병이나 지휘관처럼 상대적으로 명예롭고 위험이 적은 역할을 맡을 수 있었고, 가난한 시민은 중장보병이나 노잡이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민 내부에서도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위험의 정도는 달랐다. 더 분명한 사례는 로마 공화국에서 발견된다. 초기에는 토지를 가진 시민만 군 복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장기 원정이 계속되자 부유한 시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관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군 복무를 기피하거나 대리인을 고용하는 일이 늘어났다. 반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빈민은 군 복무를 생계 수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군대는 시민 전체의 군대가 아니라 직업군인의 군대로 변했다. 정치적 충성의 대상도 공화국에서 장군 개인으로 이동했으며, 이는 공화정의 붕괴와 제정의 성립을 가져오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근대 유럽에서는 병역 대체금 제도가 이러한 불평등을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18세기와 19세기 여러 나라에서는 일정한 금액을 납부하면 병역을 면제받거나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것이 합법적으로 허용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 이후 국민개병제가 도입되었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대리복무가 인정되었다. 부유한 청년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병역을 대신 수행하게 할 수 있었다. 공동체 전체가 누리는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위험이 시장에서 거래된 것이다.
미국의 사례는 더욱 상징적이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은 일정 금액을 납부하거나 대리인을 고용하면 징집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300달러는 노동자가 1년 가까이 벌어야 하는 거액이었다. 결국 부유층은 병역을 피할 수 있었지만 노동자와 이민자는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이러한 현실은 “부자의 전쟁, 가난한 자의 싸움”이라는 유명한 비판을 낳았고, 1863년 뉴욕 징병 폭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부유층은 병역을 회피하고 가난한 사람이 전쟁을 치른다는 역사적 패턴을 보면, 우리는 병역이 단순한 안보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유지 비용의 공정한 분담’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 역시 병역의 공정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사회적 논쟁이 되어 왔다. 법적으로는 보편적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고위공직자 아들이나 사회 지도층의 병역 면제, 특혜 복무, 불법적인 병역 비리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국민적 분노가 일어났다. 이는 단순히 병역을 회피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유지의 가장 무거운 부담이 공정하게 분담되지 않았다고 시민들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병역 자체보다 정의의 훼손에 있다. 1990년대 큰 인기를 누렸던 가수 유승준이 병역 기피 논란으로 입국 금지 대상자가 된 사회문화적 맥락을 보라. 우리 국민은 그 어느 민족보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부담이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모병 선택은 사실상 ‘강요된 선택’
병역의무는 ‘누가 싸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공동체를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다. 병역을 정의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우리는 징병제와 모병제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 존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란 사회적 협력의 부담과 이익이 공정하게 분배되는 사회라고 보았다. 정치 공동체가 제공하는 안전이라는 공공재를 모든 시민이 함께 누린다면, 그 공공재를 유지하기 위한 위험 역시 가능한 한 공정하게 분담되어야 한다. 특정 계층이 위험을 독점적으로 부담하고 다른 계층은 혜택만 누린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협력체계라고 말할 수 없다.
국가가 형성된 이래 구성원 자격은 공동체가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재화였다. 그러나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 멤버십은 권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민권이 사회적 재화인 이유는 공동체가 시민을 보호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시민 역시 공동체를 유지할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병역은 이러한 상호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만약 부유한 시민은 돈으로 병역을 대신하고 가난한 시민만 공동체를 위해 생명을 바친다면, 멤버십은 더 이상 상호적 관계가 아니라 불평등한 계약으로 전락한다.
선택적 모병제의 치명적 함정이 여기에 있다. 부유한 계층의 자녀들은 대체로 적게 받고 짧게 복무하는 징병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많이 받고 길게 복무하는 모병의 선택은 사실상 ‘강요된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당장 취업이 힘들고 생존 자체가 문제인 청년들이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한다면, 모병과 징병을 가르는 기준은 사실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형편이다.
따라서 병역의 핵심 문제는 징병제인가 모병제인가의 선택이 아니다.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는 진정한 문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큰 위험이 누구에게 집중되는가이다. 정의로운 정치 공동체는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방식으로 봉사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공동체 유지의 부담이 특정 계층에 구조적으로 집중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병역이 정의의 문제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병역은 총을 드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자유와 안전이라는 공공재를 어떤 원칙에 따라 유지하는가를 드러내는 정치적 정의의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간과하고 병역을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공동체의 안보는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