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 기반에서 종속적 노무 제공”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배달 라이더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처음 나왔다. 노동계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플랫폼 기업의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고, 최저임금위원회가 최근 무산시킨 도급제 노동자의 건당 최저임금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7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등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제38-1민사부는 지난 3일 라이더유니온지부 조합원 A씨가 배달대행 플랫폼 B사를 상대로 제기한 해고 무효 및 임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근로자 지위를 부정한 원심을 취소하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이 배달 라이더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이번 판결로 A씨의 부당해고 및 해고 기간 임금 상당액이 인정됐다.
재판부는 배달 라이더가 플랫폼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해 일하는 동안 회사의 지휘·명령을 받아 종속적인 관계에서 노무를 제공했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배달 라이더가 독립적인 사업자로 고객을 직접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사의 앱을 통해서만 주문과 배달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인 점, 보수의 산정 기준과 지급 방식 모두 회사가 사전에 정한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 배차 등에서 라이더가 온전한 결정권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이 노동자성 인정의 근거가 됐다.
아울러 재판부는 시대 변화에 따른 플랫폼 노동의 특성을 고려해 근로기준법을 탄력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와 같은 플랫폼 노동자의 노무 제공 관계에 더 부합하는 별도의 입법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더라도, 입법이 이루어질 때까지 만연히 근로자성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근로자성이 인정되는 개별 사안에서 근로기준법 규정의 탄력적인 해석을 통해 근로관계를 실질에 맞게 규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시했다.
건당 최저임금 놓고 노조 “다시 논의를”
원고 측 대리인인 법무법인 덕수의 범유경 변호사는 “플랫폼 노동이라고 해서 노동자성을 다르게 판단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확인한 판결”이라며 “플랫폼 노동이라고 해서 노동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고,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근로자성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열린 판결”이라고 말했다. 라이더유니온지부 위원장을 지낸 박정훈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사람의 직접적인 지휘·감독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 및 알고리즘을 이용한 간접적인 지휘·감독 역시 인정한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간 배달노동자는 플랫폼사에 사실상 종속된 상태로 일하고 있음에도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 등 최근 몇년 새 급속도로 확산한 대형업체 하청사의 경우 근무지역 및 급여가 정해져 있고 시간대별 목표 물량 달성이 요구되는 등 매우 구체적인 지휘·감독이 있었으나, 플랫폼사는 ‘업무 위탁 계약’이라며 사용자성을 부정했다.
노동계는 이번 판결이 플랫폼 하청업체들에서 일하는 배달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플랫폼 노동에 맞는 근로기준법의 유연한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이 판결 취지로 보인다”면서 “앱과 알고리즘을 지휘·통제의 한 방식으로 인정한 것으로, 이런 취지에서 보면 향후 대리운전이나 퀵서비스 등 노동자성 인정 범위가 넓어질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노조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심의 중인 최저임금위원회가 이번 판결을 반영해 건당 최저임금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법이 정한 최저임금 조항을 플랫폼 노동자에게도 적용해 서비스 한 건당 최저보수를 책정하고, 사용자나 플랫폼이 이들에게 법적 최저보수 이상을 지급할 의무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위는 배달 라이더나 택배기사와 같은 도급제 노동자들에게 건당 최저임금을 적용할지를 두고 올해 처음 논의를 벌였지만, 안건은 경영계의 반대 속에 지난달 표결에서 부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