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시대, 손절 대신 ‘대화’ 택한 사람들
청년 남성과 젠더 등 주제 대화
“조롱 아닌 너그러움 가르쳐야”
서울의 한 고등학교 야구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일이 불거지며 10·20대 극우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치권은 혐오에 선을 긋기는커녕 서로를 비난하며 갈등을 키우고, 온라인에선 진지한 논의보다 조롱이 먼저 오간다. ‘혐오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극우의 시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지난 5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어색한 사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무수(활동명·왼쪽)와 이한(활동명·오른쪽)이 웃고 있다. 우혜림 기자
이런 시대에 ‘손절’ 대신 ‘대화’를 택한 사람들이 있다. 청년 남성들을 직접 만나 페미니즘과 젠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젝트 ‘어색한 사이’를 기획한 이한·무수(활동명)다. 지난 5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들은 “혐오는 외로움과 관계의 빈곤에서 시작된다”며 “서로 만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여름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을 계기로 만났다. 남성 청소년 사이에 퍼진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 문화를 다룬 이 드라마를 보며 무수는 ‘폭력’ 이전의 ‘관계’에 주목했다. “왜 청년 남성들은 우정보다 인정 경쟁 속에서 살아갈까. 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돌보고 존중하는 관계를 맺기 어려울까.” 무수가 던진 질문이었다. 남성들을 조롱하기보다 그들이 다른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무수는 시민단체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에서 활동하는 이한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어색한 사이’가 시작됐다.
프로젝트에는 “남동생과 한번 이야기해달라”, “남자친구를 만나달라”는 신청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모두 9명의 청년 남성을 만났다. 만남을 거듭하며 두 사람이 확인한 것은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설명할 언어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한은 참여자들에게 “친구들과 자주 통화하느냐”고 물었다. 대부분은 술자리는 자주 갖지만 고민을 털어놓거나 감정을 나누는 관계는 없다고 답했다. “그게 괜찮냐”고 되묻자 돌아온 대답은 “잘 모르겠다”였다. 이한은 “여성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구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됐지만 남성들은 자신의 삶을 해석할 언어가 없다”며 “자신의 이야기가 없으니 사회가 던져주는 이야기에 휩쓸리기 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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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봤다. 무수는 고립·은둔 남성 청년들을 만나며 이들이 극우 집회에 나가거나 혐오적 농담을 하며 웃는 모습을 접했다. 무수가 이들에게서 발견한 마음은 “사랑받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였다. 그는 “극우 집회나 정치 집단도 결국은 ‘자리’를 만들어주는 곳”이라며 “거기 가면 누군가가 알아봐 주고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가 남성들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적을 만들어 분노를 향하게 했다”며 “선동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남성들도 자신의 삶을 해석할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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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프로젝트의 목표가 사람을 설득하거나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한 번의 대화로 달라질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낙인을 찍고 관계를 끊기보다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만 생기는 변화가 있다고 믿는다.
온라인에선 쉽게 대상화했던 사람이 눈앞에서 “피와 땀이 있는 입체적인 사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그 시작이다. 무수가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느리고 답답해요. 하지만 조롱과 비난이 아닌 유연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배우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해요. 결국 중요한 것은 ‘좋은 시민성’을 만드는 일이니까요.”
▼ 우혜림 기자 saha@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