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노동자들이 지난해 7월1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7.16 라이더 대행진에서 최저임금 보장 및 안전배달료 도입 등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최근 국제노동기구(ILO)가 플랫폼 노동에 관한 협약을 채택한 데 이어 국내 법원도 플랫폼 기업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그간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던 배달 라이더 등 플랫폼 종사자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안전장치가 마련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국제사회가 기술 발전과 노동 형태 다변화라는 시대적 전환에 대응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에서도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8일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달 12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114차 ILO 총회에서 채택된 ‘플랫폼 경제에서 양질의 노동에 관한 협약(193호)’은 고용 계약상의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가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법률상 근로자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노동권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주요국들이 플랫폼 종사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속속 내놓은 상황에서 ILO가 이를 위한 최초의 국제 노동기준을 마련한 까닭은 지난 10년간 플랫폼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은 전 세계 플랫폼 노동자가 1억5400만~4억35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 노동시장의 최대 12%를 차지하는 규모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법적으로 독립적인 개인 사업자로 분류돼 노동법의 보호 바깥에 놓인 상태다.
이런 노동 형태 변화에 대해 국내 사법부 역시 판단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고법은 배달 노동자가 기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범주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애플리케이션과 알고리즘에 의해 실질적인 노동 통제를 받고 있다면 이들의 노동자성과 플랫폼사의 사용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고용 형태 다변화에 따라 노동자의 개념을 탄력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이는 배달 라이더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첫 판결로 플랫폼 노동 종사자 전체로 봤을 때는 2024년 실시간 차량 호출 서비스 ‘타다’ 운전기사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두 번째다.
최저임금 사각지대에 놓인 플랫폼 노동자들이 지난해 5월26일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최소보수제 등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창길 기자
플랫폼 노동에 대한 국제적인 기준 정립과 국내 사법부의 전향적인 판결이 맞물리면서 그간 노동계가 요구해온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최저보수제 도입 요구도 본격화되고 있다. 노동 현장에서는 최저임금과 같은 최소한의 보수 기준이 책정되지 않아 많은 플랫폼 노동자들이 생계유지를 위한 과로와 산업재해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22~2024년 산재 신청 및 승인 건수가 가장 많았던 기업은 배달 플랫폼 ‘배달의 민족’의 물류 자회사인 ‘우아한 청년들’로 건설·제조업 등 전통적인 산재 다발 사업장을 제치고 산재 발생 기업 1위를 차지했다.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를 위한 최저보수제’는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다. 고용노동부가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 도급제 노동자들에게 건당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문제를 심의할 것을 요청해 이 사안이 38년 만에 공식 안건으로 채택됐으나 결국 경영계의 반발로 무산됐다.
현 정부 핵심 노동정책인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일하는사람기본법)과 ‘노동자 추정제’ 패키지 법안은 당초 지난 5월1일 노동절 이전 처리를 목표로 했으나 야당과 플랫폼 기업 등의 반대로 국회 법안소위에 계류된 상태다.
노동자 추정제는 민사상 분쟁에서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해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추정하고, 사용자가 ‘노동자가 아님’을 입증하게 하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 우선 노동자로 추정하는 것으로, 일하는사람기본법과 함께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등 이른바 ‘권리 밖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취지로 추진 중이다.
다만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자 개념 확장’ 없이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일하는사람기본법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 등 추상적인 권리를 명시하고 있을 뿐 사용자에게 이를 강제할 수단이나 위반 시 처벌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면서 “노동자 정의를 확대해 근로기준법을 폭넓게 적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