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여름 대학가에서 박정희 정부의 3선개헌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가 한창일 때 일이다. 정부는 시위를 과격하게 진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3선개헌과 아무 관계가 없던 주한미대사관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다.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이 타고 온 트럭에, 이것이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차량이라는 것을 알리는 미 국제개발처(USAID)의 표식이 선명히 찍혀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누군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일군의 미국인들은 표식에 주목하여 포터 주한미대사에게 찾아가 3선개헌에 중립적이라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에 진정성이 있느냐며 항의를 했다.
난처해진 포터 대사는 의외로 간단하게 문제를 처리했다. 트럭에 페인트칠을 다시 해 USAID 표식을 가려버린 것이다. 당시 포터 대사가 페인트칠을 다시 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미 국무부에 보고한 기록이 아직 남아 있다. 물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1969년에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조그만 연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제연대란 본질적으로 그런 것 같다. 당시에는 도무지 무슨 효과가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운, 개개인들의 외침 혹은 노크와도 같은 행위인 듯하지만 돌이켜보면 거대한 파도의 첫 물길과 같은 것 말이다.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렇게 여러 차례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연대한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힌츠페터 기자의 고귀한 손길이 대표적이다. ‘서구 남성’의 도움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힌츠페터의 보도로 독일에서 광주의 소식을 알게 된 이주민 여성들의 질긴 연대 활동도 있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파독간호사가 많았던 재독한국여성모임은 5·18항쟁 이후 매년 오월민중제를 개최하고, 광주학살을 알리는 전단과 자료집을 만들어 뿌리는 등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지속적으로 연대했으며 2000년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도쿄국제전범법정에 참여했다. 우리에게는 주로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으로만 널리 알려진 그들은 사실 ‘밑거름’이 아니라 고립된 고국 시민들을 향해 항해하는 항해사였다.
지난주 독일 튀빙겐에 가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제는 70~80대 할머니가 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다시 가자 구호 선단에 탄 활동가들을 떠올렸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향한 구호 선단에 탑승했던 활동가 승준은 한 인터뷰에서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 을사늑약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에 지원했던 호머 헐버트, 광주민주화운동 참상을 보도한 외신기자들”의 토양 위에서 가자를 향한 항해 운동이 자라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그도 재독한국여성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머나먼 땅에서 사는 이주민 여성의 처지에서, 광주를 고립시킨 폭력을 향해 돌을 던진 그들처럼, 구호 선단에 탄 활동가들은 가자를 봉쇄시킨 선을 끊기 위해 머나먼 땅으로부터 항해한다.
어차피 실패할 것이 뻔한 남의 나라 일에 왜 개입하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터 대사에 대한 미국인들의 항의 활동과, 힌츠페터의 보도와, 재독한국여성모임의 활동이 한국사인 것처럼 가자를 향한 활동가들의 구호 선단 탑승 역시 이제는 한국사의 궤적 안으로 들어왔다. 1969년 미국인들의 항의가 3선개헌을 무효화하지는 못했지만, 재독한국여성모임의 전단이 전두환 정부에 타격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이름 없는 연대는 기어이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다시 새로운 연대를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을 향한 그들의 항해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
권혁은 서울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