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건강검진에서 느닷없는 소견을 들었다. 1차 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받은 뒤 세포병리진단서가 첨부된 소견서와 함께 상급종합병원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이후 첫 진료까지는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암이 아닐 확률이 없다”는 말과 함께 진단을 받고 수술 날짜가 정해지기까지, 초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질문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다.
특별한 증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진단명 외에 내 상태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다. 이상 소견은 검사로, 검사는 진단으로, 진단은 수술이라는 치료 계획으로 이어졌다. 절차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러나 절차 속에서 내 이해는 생략돼 있었다. 예후가 좋은 ‘착한 암’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의 말들 사이에서, 나는 어딘가 붕 떠 있는 날들을 보냈다.
환자가 되었다는 감각은 수술 후에 또렷해졌다. 회복하는 과정에서 겪는 통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고, 이 정도의 통증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몰라 불안했다. 의료진은 친절했지만 마주하는 시간은 짧았고, “그럴 수 있어요”라는 말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의학이 낯선 언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가 되자, 막막함의 크기는 전혀 달랐다. 눈 떠 있는 시간은 먼저 아파본 사람들이 정보를 쏟아내는 커뮤니티에 붙들렸다. 내가 명확히 내뱉지 못한 통증과 불안의 언어들이 그곳에 있었다.
커뮤니티에는 통증 양상, 회복 속도, 추적 관찰 등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입원 기간 보호자가 되어준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이렇게 많은 환자가 알음알음 정보를 취하는 게 맞느냐고. 적어도 병원 안팎 어딘가에서 이런 정보를 더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의료 분야에서 오래 일해온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입을 뗐다. 같은 질병이라도 환자마다 상태가 달라 의료진이 통상적인 정보를 제시하는 데에는 위험 부담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마음이 조금 수그러지긴 했다. 커뮤니티 후기는 생생했지만 개별적이었다. 누군가의 경험담에 위안받다가, 또 다른 경험담에는 밤잠을 설친 일이 떠올랐다.
친구는 한편으로 고도로 산업화된 의료서비스 안에서는 이런 불안을 덜어주는 시장도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답이라면, 결국 불안을 덜어내는 일은 개인의 지불 능력에 맡겨지는 셈이다.
치료 범위와 비급여 항목, 간병과 휴직 여부에 따라 비용 부담에는 개인차가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국민건강보험이 의료비 부담을 낮추는 보편적 복지로 기능하고, 암 진단을 받으면 산정특례 제도로 본인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민간보험이 있다면 부담을 더 낮출 수도 있다. 비용 문제는 적어도 제도 안에서 도움을 구할 길이 있다. 그러나 의학 정보와 환자 사이 간극, 그 간극에서 생겨나는 불안은 여전히 ‘본인부담’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
현재의 진료 구조가 개별 환자에게 맞는 설명을 충분히 감당하기 어렵다면, 진료실 바깥의 설명 체계가 더 촘촘해져야 하지 않을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이미 정보는 많다. 그중에는 잘못된 정보와 개인 경험을 일반화한 사례도 적지 않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해석된 정보다. 환자가 검색창 앞에서 홀로 병을 배워야 하는 구조는 너무 불안정하다.
물론 제도가 모든 불안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환자가 자기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도록 돕는 일은 의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치료는 의학적 처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또한 의료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누구나 어느 날 환자가 될 수 있다면, 질병 앞에서 겪는 막막함도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다. 불안을 환자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 무게를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는 일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튼튼하게 해주지 않을까.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