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 책 만드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출판사 소속 여부나 회사 규모와 상관없이 비슷한 반응을 듣는다. “6월 지나고 다시 이야기할까요. 그때까지 좀 바빠서요.”
저자, 번역가, 에이전시 관계자, 편집자, 마케터, 디자이너 등 출판계 안팎 사람들이 1년을 비슷한 주기로 살아가는 계기는 매년 6월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이다. 출판사들은 이 시기에 맞춰 기대하는 작가들의 신간을 낸다. 몇달 전부터 부스를 어떻게 꾸밀지 회의한다. 인기작의 표지를 특별판으로 새로 꾸미고, 부스 콘셉트에 맞는 굿즈를 제작한다. 독자들도 분주하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에는 ‘서국도 추천 부스’ ‘서국도 꿀팁’ ‘서국도에서 책 사다 파산’ 같은 콘텐츠들이 이어진다. 행사장이 크고 부스가 많다 보니 원하는 출판사를 거치는 동선을 짜주는 앱까지 등장했다.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은하수
‘텍스트힙’의 우려와 열기 속
새 시대가 선택한 독서 양태
내향인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로
사실 서울국제도서전을 ‘서국도’라고 줄여 부르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엔 줄임말이 필요할 정도로 인기 있는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2014년 이전의 서국도는 평소 눈여겨보던 책을 할인가에 살 수 있는 일부 애호가들의 행사였다. 도서정가제 이후에도 그다지 존재감이 큰 행사는 아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후부터 조금씩 활기를 띠던 서국도는 2024년쯤부터 ‘텍스트힙’ 현상과 함께 인기가 치솟았다. 한산한 행사장을 여유 있게 거닐던 시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서국도를 주최하는 보조금 유용 의혹 등을 제기하며 예산을 삭감했음에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한 서국도는 오히려 더 큰 성황이었다. 부작용도 있었다. ‘공공재’로 여겨지던 서국도가 주식회사가 됐다는 데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우여곡절을 딛고 올해 서국도도 대흥행이었다. 개막일 아침부터 행사장인 코엑스 로비에는 ‘오픈런’을 준비하는 대기줄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인기 부스는 계산하는 줄만 수십m였다. 인기 굿즈는 첫날 오전부터 준비 수량이 동나 ‘추후 입고’를 알리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었다. 열기에 진이 빠져 ‘내년엔 못 올 것 같다’는 후기도 다수였다.
일각에선 책이 아니라 굿즈가 중심이 된 행사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굿즈 역시 독서 경험의 확장일 수 있다. 종이 위의 글자를 읽고 홀로 되새기는 것이 고전적 독서 경험이라면, 그 감상을 영상으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독서 모임을 만들고 도서전에 가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독서 경험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책의 은하수 속에서 길을 찾기 어렵다. 출판사들이 도서전을 위해 정성 다해 준비한 큐레이션은 책 우주의 지도와 같다. 굿즈 역시 여정에 동반할 작은 표식이 될 수 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간다는 것은 자신처럼 길 찾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 출판인으로부터 “바쁘실 텐데 e메일을 보내 죄송하지만…”이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글을 받고 조금 웃은 기억이 있다. 전화나 문자나 카카오톡도 아니고, 언제든 가능한 시간에 확인하면 되는 e메일 보내는 데도 이렇게 쑥스러워하는 내향인들이 모인 곳이 출판계다. 이런 출판사 사람들도 도서전에만 나오면 극외향인이 된다. 그동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독자들의 존재를 목격하고, 어떤 책을 읽을까 반짝이는 눈을 보고, 그들의 취향에 맞게 책을 추천해, 오래됐고 거대한 책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는 곳이 도서전이기 때문이다. 도서전은 단순히 책을 더 팔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의 성인 중 종이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은 10명 중 3명이 안 된다. 책 안 읽는 사회에서 도서전이 무슨 소용이냐는 비관이 있다면, 도서전이라도 있어야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고 답하겠다.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책이냐는 한탄이 있다면,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겠다. 돈 벌어서 나중에 읽겠다는 다짐이 있다면, 지금 아니라 나중은 없다고 답하겠다. 시간은 일부러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나지 않는다. 도서전 굿즈 자랑이 못마땅하다면, 주식 계좌 인증, 강남 아파트 인테리어 전시, 슈퍼카 열쇠 자랑보다는 우아하다고 답하겠다.
백승찬 문화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