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작은 잘못된 ‘응원’이었다. 지난달 29일 배재고 야구부원들은 광주제일고와의 경기에서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구호를 외쳤다.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특정 지역을 배제하는 선 넘은 응원에 호된 비판이 쏟아졌다. 논란이 됐던 스타벅스 ‘탱크데이 마케팅’을 일부러 끌어왔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분노와 우려로 시작된 논쟁이 학교 밖으로 번지더니, 이내 문제의 본질이 흐려져 버렸다. 여기저기서 “그쯤 했으면 됐지 왜 용서하지 않느냐” “징계가 과하다”란 지적이 나왔다. 배재고 학생들의 앞길을 막는다는 게 근거였다. 배재고 앞이 진영 간 ‘화환 대결터’가 되고, 급기야 이병태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이 ‘표현의 자유’까지 들고나오는 데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광주와 5·18을 비하했다’는 비판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배재고 사태는 학생들의 사과 방문과 광주일고의 선처 요청으로 일단 첫 매듭이 지어졌다. 그러나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볼썽사나운 어른들의 ‘전쟁’은 진행형이다.
발단은 혐오 드러낸 잘못된 ‘응원’
혐오에 혐오로 공격하는 어른들
국가폭력 부인엔 ‘가담자·대중’
현장 성찰로 이어져 그나마 다행
왜 이 모양인가. 영국의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은 그 근간에 ‘부인하는 권력’과 ‘외면하는 대중’이 있어서라고 짚는다. 그는 자신의 책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국가폭력 가담자들이 세 가지 부인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사실을 부인하는 ‘문자적 부인’, 사실은 인정하지만 다른 해석을 붙이는 ‘해석적 부인’, 사실과 해석은 부정하지 않지만 함의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함축적 부인’이 그것이다.
5·18을 부정하는 세력을 예로 들어보자. 모두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숨기기는 어려워졌기에 가담자들은 주로 해석적·함축적 부인을 한다. 이런 부인 논리는 배재고 사태에서도 교묘하게 동원됐다. “스타벅스가 5·18과 무슨 관계냐”(이진숙 국민의힘 의원·해석적 부인), “5·18이 성역이 된 것”(이병태 전 부위원장·함축적 부인). 가해 권력의 부인은 대중이 응하지 않는 한 힘을 얻기 어렵다. 물론 이런 억지 주장에 동조하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이 모르고 한 일”이라며 화해를 종용한 많은 이들이 촉법소년 연령 하향에도 반대 의견을 냈을지 궁금하다. 징계가 과한지 아닌지는 각자 판단이 다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함축적 부인의 도구가 돼 피해 학생과 학교,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지웠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혐오를 드러낸 야구장 떼창은 명백한 사회적 폭력이다. 이스라엘과의 경기 도중 상대팀 선수들이 홀로코스트를 집단적으로 조롱한 격(경향신문 사설)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여기에 어떤 다른 해석이 붙을 수 있나. 그럼에도 ‘혐오’와 ‘조롱’의 언사를 ‘표현의 자유’로 치환해 갈등을 증폭시키는 정치권과 일부 인사들 행태엔 가슴에서 욱하는 게 올라왔다. 배재고 야구부의 존폐까지 거론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 밖 싸움은 징계 수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편을 갈라 자기편만 옳다고 하지 않으면, 자신들 정체성에 어긋날지 모른다는 착각에 단체로 빠진 듯하다. 이 싸움을 지켜보면서 학생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와중에도 이야기의 끝은 학생들과 교육 현장의 성찰로 이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문제는 진즉에 당사자들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학생들 스스로 반성하고 용서할 시간을 빼앗아버린 것이 어른들의 큰 잘못이다.
불과 2년 전이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온 나라가 기뻐했던 것 말이다.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소설 <소년이 온다>가 5·18을 이해하는 ‘진입로’가 되길 바란다고 했었다. 그의 바람대로 시민들은 <소년이 온다>를 통해 그날의 비극을 다시 마주했다. 그렇다면 세상은 한 뼘쯤 달라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아직도 5·18이냐 반문하며 말문을 닫게 하려는 이들이 바이러스처럼 사회 곳곳에 퍼져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코언의 국가폭력 ‘부인’ 공식 그대로다. 이번에도 목소리 큰 이들은 상처받은 광주일고 학생들보다 배재고 학생들의 창창한 미래가 더 걱정이었다. 소년이 소년에게 묻는다. 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무거운 외투를 벗겨줄 생각만 하는가.
이명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