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워’ 크리스 밀러 인터뷰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
글로벌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확산으로 조성된 반도체 초호황 국면에서 한국은 독보적인 ‘AI 메모리’ 우위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를 제치고 가장 많은 영업이익을 내는 기업에 올랐고, SK하이닉스는 미국 나스닥 상장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AI 거품론이나 반도체 수요 ‘피크아웃’ 같은 전망이 꾸준히 나오고, 중국의 거센 추격과 미·일의 증설 경쟁이 이어지는 등 메모리 산업 판도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반도체 패권 경쟁을 다룬 베스트셀러 <칩워> 저자인 경제사학자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는 지난 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경쟁에 직면한 한국의 과제로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잘해 왔지만 이제는 HBM 외에 AI 추론에 적합한 메모리 아키텍처에서도 혁신을 이뤄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800조원 규모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계획에 대해서도 생산 능력 확충을 통해 한국이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경제적·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환영했다.
밀러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추가 대미 투자 압박 가능성에 대해선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중시하는 기조는 계속될 것이라면서도 “미국 기업들에 과도하게 높은 비용을 부과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빅테크들도 타격을 받게 되는 반도체 고율 관세를 실제로 부과할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으로 풀이된다. 애플이 메모리 공급난 해소를 위해 중국 메모리 기업 CXMT(창신메모리)·YMTC(양쯔메모리)의 칩 구매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선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메모리 3사에 도전할 위험이 있다”며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투자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갖는 의미는.
“‘하이엔드’ 메모리 생산에서 삼성·SK 등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 리더다. 전 세계적인 AI 데이터 센터 구축 흐름으로 메모리 수요가 과거보다 구조적으로 더 높게 유지될 것이다. 기업들이 새로운 생산 능력을 확충해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중국이 메모리 산업에서 더 큰 역할을 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구권 플레이어들이 메모리 부문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경제적·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최대 병목 지점은 뭐라고 보나.
“한국 반도체 산업 역시 다른 나라들처럼 인재가 주된 걸림돌이라고 알고 있다. 경쟁력을 최대한 유지하려면 인재 풀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추가 대미 투자를 요구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정부와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반도체 생산을 다변화하려는 것은 그럴 만한 일이다. 하지만 미 정부는 (반도체 관세 등) 더 높은 비용을 부과해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저해하는 것을 피하려 상당한 유연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미국 기술 기업들에 과도하게 높은 비용을 부과하지 않고, 글로벌 반도체 제조 가치사슬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식의 합리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본다. 트럼프의 전술이 독특했을지는 몰라도 전임 행정부들도 국내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초점을 맞춘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국 경제에서 AI가 차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고려하면 이런 기조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 메모리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은.
“최첨단 수준을 유지하려면 모든 기업들이 빠르게 앞으로 경주해야 하는데, 제조 공정이 복잡해지면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AI 워크로드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메모리 아키텍처(메모리 시스템의 설계방식)에 대한 수요가 이전보다 늘어났기 때문에 메모리 산업의 경쟁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SK하이닉스가 경쟁사들보다 먼저 HBM에 집중하면서 지난 몇 년 간 매우 잘해 왔지만, HBM이 AI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메모리 솔루션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추론에 적합한 메모리 아키텍처를 찾는 게 관건이다. 새로운 메모리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는 것이 기업들이 우위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번 메모리 호황은 이전과 어떻게 다른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메모리 반도체의 새로운 용처가 나타났다. 과거에는 휴대폰, 컴퓨터, 전통적인 클라우드 컴퓨팅용 메모리였다면, 이제는 AI라는 중대한 새로운 성장 동력이 메모리 수요를 한 단계 높게 끌어올리고 있다. 극적인 성장이 어느 시점엔 둔화하겠지만, 업황 사이클도 AI로 인한 메모리의 구조적 수요 증가를 바탕으로 전개될 것이다.”
-애플이 메모리 공급난 해소를 위해 중국산 칩 조달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정부나 기업들은 CXMT로부터 칩을 구매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 CXMT가 범용 시장에서 SK하이닉스, 삼성, 마이크론 등의 메모리 사업에 도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메모리 기업들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기에 수익성 위협 논의가 비현실적으로 보이겠지만, 메모리 사업에는 사이클이 존재한다. 언제이든 침체기가 오면 CXMT는 중국 정부의 투자 지원으로 특권적 위치를 점할 수 있지만, 주주가 있고 수익성을 고려해야 하는 기업들은 유연성을 갖지 못할 수 있다. 메모리 공급 부족 상황이더라도 미국 정부·기업이 CXMT의 시장 점유율 확대를 허용하는 것에 주저해야 한다고 본다.”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들에 미국에 우선적으로 메모리를 공급하도록 압박할 여지는.
“현재 메모리 성장의 핵심 동력은 AI이며, AI 데이터센터가 가장 많이 지어지는 나라는 미국이다. 이미 HBM은 미국에 불균형적으로 많이 유입되고 있다. PC 등 공급망은 매우 상호 연결되어 있고 복잡하다. 정부가 어떤 메모리 칩이 어떤 사용자에게 갈지를 좌우하려는 식으로 무리하게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중국 CXMT·YMTC에 대한 미 국방부의 ‘군사 기업’(1260H) 지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미국 정부는 중국이 반도체 부문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을 경제적, 전략적 위협으로 여긴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CXMT와 YMTC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들이고, 미국이 이들의 시장 점유나 자본 조달, 파트너십 체결 능력을 제한해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전반적으로 억제하려는 추가 조치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미국 정부가 중국의 반도체 산업 투자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중국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입지를 더욱 확대하는 것을 쉽게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지분 인수 등 지원을 받은 인텔이 시장 경쟁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지난 6개월 동안 인텔이 매우 선전한 것은 인텔이 생산하는 중앙처리장치(CPU) 칩 수요가 추론 워크로드 확대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인텔 투자 결정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문제는 인텔의 제조 부문 경쟁력 회복이다. 1년 전에 비해선 초기 신호가 긍정적이지만 아직도 시장 리더인 TSMC와 경쟁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트럼프 2기 반도체 관련 수출통제나 관세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트럼프 행정부가 강력한 반도체 국내 제조 기반을 우선시한 것은 옳았지만, 관세 위협 등과 같은 도구들이 종종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반도체 관세 위협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미국은 무역 경쟁국이 아닌 파트너로 봐야 하는 나라들과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일본, 대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들의 무역 관행 일부를 비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세 나라는 미국이 직면한 주요 경제적·전략적 도전 과제인 중국과는 매우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
-대만이 AI칩의 중국 수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일본은 대중 수출통제에 어떤 자세를취해야 하나.
“한국도 수출통제 위반을 줄이려는 노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한 반도체 부품이나 제조장비 차단이 중요하다. 중국 CXMT, YMTC 같은 기업들이 더 많은 고성능 메모리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중 AI 경쟁에서 누가 이기고 있다고 보나.
“AI 모델 역량이나 매출 측면에서 본다면 오픈AI, 앤트로픽이 분명히 앞서 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AI 경쟁에서 확실히 이기고 있다. 물론 중국도 여러 면에서 인상적이지만, 미국과 중국의 위치 중 어디에 있고 싶은지 묻는다면 답은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피지컬 AI나 로보틱스 등에선 중국이 훨씬 더 강력한 위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