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안전을 넘어 - 기록되지 않은 안전은 없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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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부터 위험성평가는 더 이상 권고가 아니다. 모든 사업장이 반드시 이행해야 할 법적 의무가 되고, 미이행 시 과태료가 부과된다. 연 1회 정기평가에 머물던 방식에서 벗어나, 공정이 바뀔 때마다 실시하는 수시평가와 매일 작업 전 진행하는 TBM(작업 전 안전점검 회의)이 법적 이행 수준으로 관리된다. 규제의 철학 자체가 ‘무엇을 설치하라’에서 ‘어떤 위험을 제거하라’는 성과·결과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핵심은 분명하다. 앞으로는 ‘법을 지켰는가’보다 예방 활동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했고, 근로자와 공유됐으며, 기록으로 증빙되는지가 안전의 척도가 된다.
이 변화에 손으로 쓴 서류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필요한 것은 업무 프로세스 자체의 디지털 전환(DX)이다. 관리자가 모바일로 현장의 결함을 등록하면 시스템이 이를 위험성평가 데이터베이스와 연동하고, 위험 등급에 따른 조치 우선순위를 제안한다. 특정 구역에서 장비 결함이 반복 신고되면 시스템은 해당 공정의 위험 등급을 자동으로 올리고, 관리자에게 즉시 알린다. 데이터가 스스로 분석하고 명령을 내리는 구조, 즉 안전관리의 표준인 PDCA(계획-실행-점검-조치) 사이클이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이 전환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 있다. 현장 실무자의 수용성이다.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도 실무자가 거부하면 무용지물이다. 이들의 저항은 보수성 탓이 아니라 효율성의 문제다. 중소기업과 소규모 공공기관의 안전 담당자는 대부분 겸직이다. 인사·총무·시설 관리만으로도 과부하인 이들에게 ‘수기 업무는 그대로 두고 시스템 입력까지 하라’는 요구는 또 다른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에게 시스템은 종종 감시의 눈으로 읽힌다. 사고 시 자신의 과실을 증명할 기록이 남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발상을 뒤집어야 한다. 시스템은 일을 더하는 감시자가 아니라, 서류 업무를 ‘대체’해 퇴근 시간을 앞당겨 주는 유능한 비서여야 한다. 비전문가 담당자가 겪는 가장 큰 공포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수천 페이지의 안전보건 법령을 완벽히 숙지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때 시스템이 먼저 알려줘야 한다. ‘이번 공사는 지붕 작업이 포함되므로 추락 방지 조치와 사다리 작업 지침을 확인하라’고. 전문 지식이 없어도 시스템의 로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법적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지식의 표준화다. 협력사 작업자가 입구에서 모바일로 안전교육을 이수하면 결과가 즉시 기록되고, 담당자는 ‘전원 교육 완료’ 알림만 확인하면 된다. 수기 입력에 3~4시간 쓰던 일이 1분으로 줄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은 책상이 아니라 실제 위험 구역을 한 번 더 순찰하는 데 쓰인다.
진짜 전환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관리자가 아니라 그곳에 발을 딛고 일하는 작업자다. 작업자가 사소한 불안 요소나 ‘아차 사고’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즉시 신고하고, 그 신고가 어떻게 조치됐는지 실시간 피드백을 받을 때 현장의 신뢰가 쌓인다. 신고 포상제로 안전 마일리지를 주면 안전은 지겨운 규제가 아니라 참여하면 혜택이 따르는 문화로 바뀐다. 관리자 혼자 짊어지던 안전의 무게를 현장 전체가 나누는 상향식 안전 체계다. 최근 대형 건설사들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AI 통·번역 솔루션을 도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시스템이 데이터를 걸러주면 관리자는 일일이 기록을 대조하는 대신 걸러진 정보를 확인하고 결정하는 컨트롤타워에 집중할 수 있다. 안전 담당자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더 두꺼운 점검표가 아니라, 묻는 즉시 답하는 비서다. 그리고 그 비서가 만들어 내는 ‘데이터’야말로 다가올 안전보건공시제 시대의 진짜 성적표가 된다. 그 이야기를 다음 회에서 이어간다.
안영찬 동국대 교수 (중대재해처벌법·안전경영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