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성이 시계를 수리하고 있다. 픽사베이 제공
미국 농기계 제조업체 존 디어는 인공지능 기술을 장비에 도입해 ‘농슬라’(농기계 테슬라)로 불린다. 이 업체의 성장 뒤에는 ‘수리 독점’이 있다. 존 디어는 트랙터 제어 소프트웨어에 잠금장치를 걸어두고, 자신들만 고칠 수 있도록 했다. 농민들은 간단한 고장조차 본사 정비 기사를 기다려야 했고, 대기 기간이 길어져 수확 시기를 놓치는 낭패를 겪는 일도 있었다. 분노한 농민 20만명이 2022년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4월 회사 측이 9900만달러(약 1350억원)를 농민들에게 지급하는 데 합의했다. 이 사건은 소비자들이 ‘수리권’을 쟁취한 대표적 사례다.
수리권은 소비자가 제품을 고쳐 쓸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연합(EU), 호주 등에서 이미 법제화됐고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추세이나 한국에선 개념조차 낯설다. 2022년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이 개정되면서 수리권이 법적 지위를 얻긴 했으나, 세부 규정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환경단체들이 수리권 개념을 환기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최근 사회적협동조합 빠띠가 진행 중인 ‘수리할 권리를 위한 시민행동’ 서명에 9일 현재 762명이 참여했다. 서울환경연합이 지난해 수리권 조례안을 만들어 서울시와 각 자치구에 조례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수리권이 주어지더라도 행사하는 데는 난관이 적지 않다. 요즘은 고쳐 쓰기보다 새로 사는 게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수리점도 흔치 않거니와 수리하러 갔다가 ‘부품이 없다’는 답을 듣기 일쑤여서 울며 겨자 먹기로 신제품을 사는 일이 흔하다.
수리권은 소비자 복리뿐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큰 만큼 정착시켜야 할 권리다. 유럽환경국 분석에 따르면 유럽 내 스마트폰 수명이 1년씩 연장되면 약 400만t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한국에서 1년에 버려지는 우산은 4000만개. 이 우산의 금속활을 합하면 한 해 에펠탑을 25개나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 수치다.
과거 물건이 귀하던 시절에는 동네마다 ‘○○전업사’ ‘○○소리사’ 같은 가게에서 물건을 고쳐 쓰곤 했다. 이 당연한 권리를 물건이 넘쳐나는 요즘엔 ‘주장까지’ 해서 확보해야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