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e Young-whan. Pop Song 2 - Body, 1999
최근 작업실 책을 다시 정리하다 1986년에 출간된 탁월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저서 <전체에 대한 통찰>을 또 읽게 되었다. 그가 시인 기형도에 대해 쓴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 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기의 감정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기형도의 표현을 빌리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지 못한다. 그것은 보기에 흉하다.
좋은 미술가도 마찬가지다. 미술계에 그런 작가는 많지 않다. 최근에 아쉽게 세상을 떠난 배영환은 그런 작가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서 장례식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고, 그의 재치와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작업들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배영환의 작업은 김현이 말한 그대로였다. 자신이 가진 상처를 반성, 분석하고 거기에 창의력을 보태어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의 본격적인 첫 개인전이었던 1999년 금호미술관 전시가 그 시작이었다. 그는 내게 가끔 사춘기를 지나던 시절의 서울 어느 곳 뚝방 정서를 말했었다. 그에게는 약간은 위악적인 양아치스러운 상처가 있었고, 그것들을 잘 다스려 작품에 사회적, 보편적 의미를 부여했었다.
그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몸’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면도칼을 타일 위에 붙여 ‘몸’이라는 글자를 만든 작업이다. ‘몸’이라는 단어와 여러 장의 면도칼은 예민하게 부딪친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말랑말랑한 인간의 몸은 약하고 면도칼은 얇고 날카롭다. 둘이 부딪치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작품 안에 있다. 그리고 그 힘은 감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 몸을 가졌다는 조건과, 면도칼을 무기로 쓰는 폭력적 정서와 만난다. 자세히 보면 ‘몸’이라는 작업은 건강한 몸이 아니라 약을 바른 흔적이 남아 있는 상처 입고 아픈 몸이다.
이상의 느낌은 확대되어 우리 사회의 일부 청소년들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 관점들과 부딪힌다. 이 충돌은 아주 냉정하게 아무런 설명 없이 매끈한 타일 위에 ‘몸’이라는 기호로 존재한다. 즉 김현의 말처럼 과장하거나 억지로 감추지 않는다. 면도칼로 이루어진 그 기호는 불편하고 위태로우며, 개인의 감각을 넘어서 사회적 공감각을 건드린다.
이 작업들을 시작으로 배영환은 일반적인 미술 작품의 통념에 카운터펀치를 먹였다. 그리고 미술계의 인정을 두루 받았다. 오래전 내가 재개발 지역을 촬영할 때, 그도 버리고 간 자개농을 주워 기타를 만들기 위해 함께 다니기도 했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그와 별 교류는 없었다. 각자 사느라 바빠서, 혹은 서로 무심해서, 그저 작품을 하고 잘 지내고 있구나 싶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겨우 57세, 아직 할 작업들이 많았는데… 하지만 이제 그는 없다.
작가들이여 부디 몸을 살펴 가면서 작업들 하시라. 나도 몸이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아프고 나서야 사실은, 몸이 곧 내 주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었다. 몸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부디 몸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아껴 쓰며 작업하기 바란다. 잘 가라, 영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