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이후 태어난 최초의 인간 가인은 불행하게도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성경은 그 비극의 원인을 단순한 충동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견딜 수 없었다. 살인을 저지른 가인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 수 없었다. 무고한 피가 스며든 땅을 떠난 그는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다.”(창세기 4:16)
‘놋(Nod)’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동사 누드(nud)에서 왔다. ‘유리하다’ ‘떠돌다’ ‘흔들리다’란 뜻이다.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인간 실존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놋은 지도 위 한 지역이라기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이 살아가는 영적 주소와도 같다.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머물 곳을 잃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 역시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마음은 더 빈곤해졌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한다. 뒤처질까 두렵고, 잊힐까 불안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자기 삶의 가치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을 더 의식하며 살아간다. 자유를 잃은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래서 문득 묻게 된다. 경쟁과 소비의 논리 밖에서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내가 자주 들르는 자그마한 식당이 있다. 그곳에서는 소비사회의 논리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주인은 가장 안전하고 신선한 재료를 구하려 애쓴다. 손님의 건강 상태에 따라 맞춤한 음식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그 식당에서는 가끔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단골손님 가운데는 꽃을 사와 식당 한편에 꽂아두는 사람이 있고, 여행지의 특산물을 가져오는 이들도 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손님은 계절마다 갓 수확한 채소와 과일을 보내온다. 주인은 더 풍성한 식탁을 차려 손님들에게 제공한다. 그곳에서는 거래보다 선물이 먼저 오간다. 받은 만큼만 되돌려주는 셈법이 아니라, 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선물은 관계를 만든다. 그곳에서 손님들은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이웃이 된다.
생각해보면 고향이란 원래 그런 곳이다. 고향은 태어난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외부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곳,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공간이 고향이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인간에게는 ‘거룩한 천개(Sacred Canopy)’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거룩한 천개란 인간이 세상 속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보호막이다. 천개가 햇볕과 비를 막아주듯 인간을 보호해주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오늘날 거대한 제도와 시스템은 날로 정교해지지만, 정작 개인을 품어줄 거룩한 천개는 점점 얇아지고 있다. 효율성을 따지는 세상 속에서 조건 없는 환대는 사라졌고, 마음 둘 곳을 잃은 이들은 군중 속에서 깊은 고독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득한 낙원 에덴이 아니라, 서로 울타리가 되어주던 마음의 고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을 완벽히 만들거나 세상을 한꺼번에 바꾸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작은 식당 하나가 고향이 될 수 있고, 서로를 성심껏 맞아들이는 작은 모임이 거룩한 천개가 될 수 있다. 몇사람이 둘러앉아 서로를 아끼고 함께 웃으며 짐을 나누는 곳이라면 어디든 에덴의 동쪽에 세워진 작은 고향이다.
가인은 놋 땅으로 떠났고 떠도는 삶은 그의 운명이 되었지만 인간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록 에덴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지만, 이 척박한 에덴의 동쪽에서 서로에게 따뜻한 집이 되어줄 수는 있다. 완벽한 낙원을 되찾지 못할지라도, 그 낙원의 꿈은 서로를 환대하는 공동체를 통해 비로소 영글어간다. 어쩌면 고향은 먼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품을 때 비로소 현재가 되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