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비가 내렸다. 내 친구의 개는 번개만 치면 덜덜 떤다고 했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 모양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비슷하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면 불안해진다. 재난안전 문자가 잦아지는 계절이 왔다. 핵발전소 건설과 각종 난개발 등, 함께 살펴야 할 긴급한 현안들이 많은데 비가 내리니 그제야 새삼 깨닫는다. 이 모든 현안 하나하나가 서로 얽혀 지구의 거주 가능 조건과 직결된다는 것을. 무감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날 기후를 재난의 얼굴로 마주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기후위기를 떠올리는 일은 우울감과 상실감, 무력감 등 부정적인 정동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빛을 발견하기도 한다. 마을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만지고, 고요 속에서 웅성거림을 분별해보는 일. 이끼를 들여다보고 식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 개와 산책하며 들꽃이 피고 지는 때를 알아차리고, 천변을 찾는 철새들이 오고 감을 헤아려보는 일. 동물의 살처분과 잔인한 수단화 앞에서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마음들이 어느새 대화가 되는 일. 기후위기 담론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나쳐버렸을 풍경들이다.
최근엔 동료들과 다큐멘터리 <정뱅이> 공동체 상영회를 추진했다. 영화는 집중호우로 침수된 한 마을의 피해와 그 이후를 공동체적 돌봄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공동의 상실 속에서도 자신의 생존만이 아니라 타인의 생존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들의 용기와 배려를 전한다. 이 영화는 기후위기의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늘의 기후 체제와 정뱅이마을의 수해를 직접 연결해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앞으로의 재난에 성숙하게 임하는 공동체적 제안을 들려주는 듯한 이 영화의 울림이 무척 컸다.
대전 갑천 상류 지역인 용촌동 정방(정뱅이)마을은 2024년 7월 집중호우로 침수되었다. 물은 비닐하우스를 무너뜨리고 처마까지 차올랐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보트를 끌고 거센 물살을 헤치며 고립된 어르신들을 구하러 다녔다.
영화 속 전문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큰 재난에서 가장 먼저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이웃이다. 마을의 지형과 집안 구조를 잘 알고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이 실제 구조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긴급 구호가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정뱅이 주민들은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상실의 흔적과 트라우마를 안은 채 이웃과 저녁을 함께 들고 앞으로의 삶을 함께 논의했다.
나는 물살을 헤치며 이웃을 구하러 들어가던 한 주민의 뒷모습을 계속 상상한다. 밥을 나누려는 마음을 떠올린다. 어쩌면 서로의 선의에 빚지고 있음을 아는 데서, 폐허 속에서도 환대와 돌봄의 문화가 조금씩 쌓여갈 수 있었던 건 아닐지.
기후위기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탄소 감축이 절실하다. 끝없는 성장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멈추고 다른 삶의 방식을 축적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관점에 따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으나, 재난 이후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제도적 지원과 돌봄을 미리 준비하는 사회적 상상력도 중요성을 더한다. 재난과 폐허의 시간에도 서로를 구하러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우중의 마음을 밝히는 듯하다.
윤은성 시인·기후생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