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루프
에스와르 S 프라사드 지음 | 박재영 옮김
21세기북스 | 420쪽 | 3만9900원
세계화는 국경을 초월한 무역과 금융으로 전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혜택이 불균등하게 돌아가면서 개발도상국에선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선진국에선 제조업이 무너지며 일자리가 사라졌다. 경제 양극화는 정치적 분노를 불렀고, 포퓰리즘과 보호무역주의, 제도 훼손으로 이어졌다. 번영과 안정을 보장할 것으로 믿어졌던 세계화, 자유무역, 그리고 기술 발전이 서로를 죄며 혼란을 부추기는 ‘파멸의 고리(Doom Loop)’로 변질된 것이다.
<둠루프>는 이 악순환의 구조를 짚는다. 과거 안정의 장치들이 불안정의 원인으로 뒤집힌 현실에 주목한다. 달러 패권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미국의 재정 불안과 정치적 혼란, 금융 제재 남용은 각국에 달러 의존을 줄이려는 유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유로화·위안화 등은 대안이 되지 못해 달러를 불신하면서도 달러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진다.
인공지능 등의 혁신은 생산성 향상과 경제적 기회를 약속하지만, 동시에 양극화와 혼란을 증폭시킨다.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와 국제협력의 제도적 기반으로 여겨졌지만, 불평등과 불신이 커지면서 포퓰리즘과 자국 우선주의에 흔들리고 있다. 국제기구는 협력의 규칙을 만들기 위해 세워졌으나, 강대국의 일방주의 앞에서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저자는 파멸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제도의 복원을 강조한다. 기후변화 대응처럼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은 협력의 장으로 남기고, 충돌이 불가피한 영역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중국의 비시장적 정책을 비판하려면 미국 등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나 방만한 재정·통화 정책에도 같은 강도의 비판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책은 2024년 윤석열의 불법계엄을 버텨낸 한국의 민주적 제도도 언급한다. 정부의 투명성, 사법부 독립,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유도 이러한 ‘제도에 의한 지배’를 위해서다.
현 상황을 정리한 진단서에 가깝다. 오늘의 혼란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악순환으로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데 책의 미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