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과학자
이동주 지음
위즈덤하우스 | 304쪽 | 2만2000원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 독일에서 사용하던 마르크화의 고액권인 500마르크 지폐 주인공은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라는 여성이었다. 신비로운 곤충의 세계를 관찰해 그림으로 옮겼던 그는 최초의 생태학자로 불린다. 곤충이 탈피하는 과정을 세밀히 관찰해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의 과학적 성취는 신학이 과학적 판단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던 17세기 당시에 비난의 대상이 됐다. 생물이 탈피하며 변한다는 주장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타국에서 빈곤에 시달리며 외로운 죽음을 맞은 여성 과학자는 270년이 훌쩍 지난 1990년에야 지폐를 통해 고국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었다. 그가 그렸던 말벌과 나비 애벌레, 나방, 바퀴벌레 등 많은 작품은 2000년대 이후 그녀를 비범한 과학자로 평가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대상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류한다.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대상을 보고,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도록 남기는 일이다. 사진도, 문자도 없던 시절. 그것이 가능하도록 한 방식은 ‘그림’이다. 그림은 가장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이해를 이끈 매체로 작용했다.
동굴에 남은 생명의 그림부터 21세기의 세밀한 현미경 기록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자연을 정확히 그려낸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메리안 외에도 여러 과학자가 소개된다. 곤충학자 파브르, 데이터 사이언스에 한 획을 그은 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 화석에서 고생물의 생태를 밝혀낸 메리 애닝, 조선시대 어류 연구의 기틀을 세운 김려 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에 대한 관찰, 세밀한 기록이 어떻게 과학적 가설의 결정적 증거가 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과학사의 주변부에 있던 그림을 중심무대로 불러내기를 시도한 저자는 국내 1호 자연과학 책방을 운영하는 현장 생물학자다. 그 역시 자연학 연구를 위해 그림을 그려온 과학자이기도 하다.